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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세계적 수준이라던 ‘문화비축기지’는 왜 유령 전시장이 됐나

등록 2020-02-12 17:37수정 2020-02-13 02:41

2017년 석유탱크 개조한 공간
높이 15m 300평 ‘탱크4’ 전시장엔
축제·서커스 등에 편중한 행사
전시 19건…특화 콘텐츠는 전무
산에 가로막혀 접근성도 낮아
서울시 차원 공간 전략 구상 등
아트 플랫폼 활성화 목소리 나와
서울 마포구 성산동 문화비축기지 경내 탱크4에서 열리고 있는 권민호 작가의 설치영상전 현장. 공사용 비계 같은 대형 구조물에 붙은 스크린에서 1970년대 산업화 시기의 공장, 발전소, 생산품 따위의 도면을 옮긴 드로잉이 돼지, 닭 등의 가축이 스멀거리는 이미지와 함께 투사된다.
서울 마포구 성산동 문화비축기지 경내 탱크4에서 열리고 있는 권민호 작가의 설치영상전 현장. 공사용 비계 같은 대형 구조물에 붙은 스크린에서 1970년대 산업화 시기의 공장, 발전소, 생산품 따위의 도면을 옮긴 드로잉이 돼지, 닭 등의 가축이 스멀거리는 이미지와 함께 투사된다.
“이제 불 끄러 가야 해요.”

지난 9일 오후 6시를 넘긴 시각, 서울 성산동 문화비축기지 탱크4(T4) 전시장 구석을 지키던 전시 담당 주무관 최윤정 큐레이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300평 넘는 탱크4 내부 전시장을 돌며 조명과 설치 영상물의 스크린을 일일이 껐다.

이곳에선 지난해 12월22일부터 미디어아티스트 권민호 작가의 개인전 ‘새벽종은 울렸고 새 아침도 밝았네’가 열리고 있다. 1960~70년대 생산품, 공장시설, 기계장치 등의 도면 드로잉과 이를 가축들 이미지와 중첩한 애니메이션을 대형 영상으로 보여주면서 산업화 시절의 의미를 성찰하게 하는 전시다. 텅 빈 전시장에서 거대 영상의 불빛들만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풍경은 소품으로 놓인 사운드아트 메가폰의 웅웅거리는 기계음과 섞여 유령의 무대를 떠올리게 했다. “정식 관리 요원이 없어 작가와 제가 자원봉사자들과 전시장을 여닫거나 보안장치를 점검한다”고 최 큐레이터는 말했다.

권민호 작가의 설치영상전 현장. 국내 최초의 고유 모델 승용차로 꼽히는 포니차의 도면 이미지가 닭과 병아리가 꾸물거리는 이미지와 중첩된 영상으로 투사되고 있다.
권민호 작가의 설치영상전 현장. 국내 최초의 고유 모델 승용차로 꼽히는 포니차의 도면 이미지가 닭과 병아리가 꾸물거리는 이미지와 중첩된 영상으로 투사되고 있다.
16일 막을 내리는 이번 전시의 하루 평균 관객 수는 평일 80~100명, 주말은 180~250명 정도다. 300평 넘는 원형 전시장에 펼쳐진 미디어아트 작품의 거대한 규모를 생각하면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다. 발전소를 개조한 영국 테이트모던 등 전세계 각지의 리모델링 미술관에서 탱크 갤러리는 명소로 등장한다. 문화비축기지의 탱크 전시장 또한 규모나 시설에서 세계적 수준에 뒤처지지 않는다. 20년 전까지 원유가 꿀렁거렸던 탱크4 내부는 층고만 15m로 속삭임도 큰 메아리로 퍼지는 공간이다. 인근 탱크5는 날개처럼 펼쳐진 267평짜리 회랑형 전시장이 중앙 공간을 감싸고 있는데, 중앙부에는 360도로 영상을 쏠 수 있는 첨단 투사 장치까지 갖췄다. 권 작가의 개인전도 국내 보기 드문 대형 미디어아트 전시를 탱크에서 한다는 매력 덕분에 동료 작가들이 자발적으로 준비에 참여했다. 최 큐레이터가 판을 깔고 인터랙티브디자이너 이재옥씨, 미디어아티스트 김인근씨가 협업작가로 나서 구조물을 자기 작품처럼 일일이 제작했다. 권 작가는 “크고 깊은 탱크 안에서 하고 싶은 시도를 마음껏 펼쳐 행복했다. 공간이 잘 알려지면 현대미술 명소가 될 텐데 아쉽다”고 말했다.

진입로에서 본 마포 문화비축기지의 모습.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이 탱크6 커뮤니티센터. 왼쪽 뒷산(매봉산) 너머로 상암 디지털미디어시티 주상복합 빌딩이 보인다.
진입로에서 본 마포 문화비축기지의 모습.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이 탱크6 커뮤니티센터. 왼쪽 뒷산(매봉산) 너머로 상암 디지털미디어시티 주상복합 빌딩이 보인다.
탱크 공간이 주목받지 못한 데는 문화비축기지의 전시 기획이 그동안 미술판에서 뚜렷한 인지도를 얻지 못한 측면이 크다. 2017년 9월 옛 석유비축기지를 개조한 문화비축기지가 개장한 이래 120여건의 행사가 치러졌다. 전시는 19건에 불과하고, 기지의 장소적 성격을 브랜드처럼 특화한 문화기획물은 사실상 전무했다. 권민호전의 경우 시각예술워킹그룹이란 시민 협의 기구의 논의를 거쳐 작가가 선정됐지만, 기획전 논의가 본격화한 건 지난해 7월 문화기획팀이 신설되면서 일어난 변화였다. 360도 영상투사기 같은 첨단 설비는 홍보 영상만 틀다가 최근에야 작업 용도 전환을 추진 중이다. 과거 산업 유산을 리모델링한 기지의 역사성·장소성을 살리려면 시장, 서커스, 축제 같은 단기 이벤트에 편중된 지난 2년간의 운영 틀을 대폭 바꾸고 기획자·예산을 확충해 특화된 콘텐츠를 만들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일부 미술인들은 서울시 차원에서 기지의 주목도를 높이기 위한 공간 개편 전략을 구상해야 한다는 주문도 내놓는다. 기지는 상암동 디지털미디어시티와 1.5㎞ 거리지만, 뒷산인 매봉산이 가로막아 연결로 없이 등을 진 지세에 놓여 있다. 매봉산에 상암동 미디어시티에서 기지 공원으로 오는 직통 인도 등을 내어 접근성을 크게 높여야 한다는 의견이다. 서울시립미술관의 한 기획자는 “서울 서부 부도심권에서 예술인의 아트 플랫폼이 될 수 있는 잠재 조건을 충분히 갖춘 시설”이라며 “미술관과 작가가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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