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라미란을 떠올리면 괜히 웃음부터 짓게 된다. 코미디 연기 이미지가 강해서다. 시트콤 <막돼먹은 영애씨>에서 이영애(김현숙)의 회사 동료 ‘라미란’으로 대중에게 이름을 알릴 때부터 그랬다. 이어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정환(류준열)의 엄마 ‘라미란’을 연기하며 완전히 떠버렸다. 화려한 호피 의상을 고집해 ‘치타 여사’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한 이 배역은 까불고 웃기는 캐릭터가 아니다. 무뚝뚝하면서도 가족과 이웃을 살갑게 챙기는 따뜻한 인물이다. 하지만 드라마 전체를 감싸는 따스한 웃음 덕에 치타 여사도 유쾌한 이미지의 옷을 입게 됐다.
“저는 무디고 무던한 사람이에요. 말도 많지 않고, 흥분도 잘 안 하고, 감정 기복도 크지 않아요. 치타 여사 때는 작가가 저의 그런 성격을 대본에 잘 반영해줬어요. 웃기려 한 건 아닌데, 시청자들이 제 나름대로 해석한 인물에 많이 공감해주신 것 같아요.”
최근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서 만난 라미란은 차분하고 솔직담백했다. 대놓고 웃기려 작정한 영화 <정직한 후보>(12일 개봉)의 주인공답지 않다고 생각하는 순간, 허를 찔렀다. 왜 이 영화에 캐스팅됐다고 생각하냐 물으니 “예뻐서”라고 했다. 단독 주연을 맡아 다른 40대 여성 배우들의 본보기가 되는 데 대해 책임감을 느끼냐는 질문에는 “내가 잘되는 게 중요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헛갈렸다. 하지만 농담 안에 진솔하고 깊은 속내가 담겼음을 깨닫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웃음 안에 진지함을 담고, 진지함 안에 웃음을 담는 배우, 그가 바로 라미란이다.
라미란은 <정직한 후보>에서 3선 국회의원 주상숙 역을 맡았다. 사람들 앞에선 청렴한 서민의 일꾼을 자처하지만, 뒤에선 고급 빌라에서 명품 옷과 구두로 치장하는 이중생활을 하며 ‘서민이 내 일꾼’이라 여긴다. 그러던 어느 날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거짓말을 할 수 없게 되면서 선거판이 발칵 뒤집힌다. 텔레비전 토론과 선거 유세 현장에서 진실만을 얘기하게 되면서 소동이 벌어진다. 라미란은 전반부에선 겉과 속이 다른 능구렁이 정치인으로, 후반부에선 저도 모르게 속마음을 줄줄 쏟아내며 당황하는 후보로 맞춤 연기를 하며 웃음을 이끌어낸다.
‘라미란표 코미디의 정점’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하니 그는 손사래를 쳤다. “코미디가 제일 어려워요. 사람을 울리고 화나게 하는 것보다 웃게 만드는 게 훨씬 더 힘들어요. 관객을 어떻게 웃길까 고민하며 뼈를 깎는 고통으로 치열하게 촬영에 임했어요. 부담감도 엄청났죠.”
그렇게 힘들다면서 왜 이 영화를 택한 걸까? “사람들이 나에게 원하는 게 이런 모습인가? 어차피 겪을 거라면 갈 데까지 가보자 했어요. 내가 코미디로 어디까지 밀어붙일 수 있을 것인가, 저도 간을 본 거죠. 이래도 안 웃어? 제발 한번이라도 웃어줘. 이렇게 계속 미끼를 뿌리며 웃음을 강요하는 영화가 흔치는 않잖아요. 배우로서도 좋은 기회였어요.”
<정직한 후보>의 원작은 대통령 선거에 나선 남자가 주인공인 브라질 영화다. 장유정 감독은 “무조건 라미란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캐스팅부터 한 다음 주인공을 여자로 각색했다”며 “미운 짓을 해도 밉기보다는 사랑스러운 느낌을 주고, 실없는 농담에도 뼈를 담을 줄 아는 배우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라미란은 “감독님이 제 이면을 보고 캐스팅한 것 같다”며 “감사한 일”이라고 했다. 라미란은 40대 여성 배우가 좀처럼 주연을 맡기 힘든 한국 영화계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떠올랐다. 지난해 <걸캅스>에서 이성경과 함께 여성 투톱 주연을 맡은 데 이어 이번엔 원톱 주연으로 나섰다. 부담감이나 책임감도 느끼지 않을까? “앞에 나선 처지가 됐으니 좋은 선례를 남기면 좋겠죠. 일단 나부터 잘되는 게 중요해요. 그다음에 남자·여자 영화를 떠나 더욱 다양한 이야기가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저도 배우로서 입지를 잘 다지고 나면 하고 싶은 작품 맘대로 하고 싶어요.”
라미란은 지난 4일 종영한 <티브이엔>(tvN) 드라마 <블랙독>에서 진중하고 사려 깊은 박성순 선생님 역으로 호평받았다. 그가 이런 캐릭터를 맡은 건 처음이다. 그는 “<정직한 후보>를 하기로 결정한 즈음 정반대의 <블랙독> 대본이 와서 둘 다 하면 좋겠다고 나름 계산한 것”이라고 했다. <정직한 후보>의 주상숙과 <블랙독>의 박성순 중 누가 더 연기하기 편했냐고 물었다. “박성순 선생님처럼 폭이 크지 않은 인물이 편해요. 다만 대사가 많지 않아 다른 걸로 보여줘야 하는 건 힘들었어요. 둘 다 나름의 장단점이 있는데, 개인적 성향으론 박성순 같은 인물을 연기하는 게 더 재밌어요.”
짧은 시간, 극과 극의 캐릭터를 오간 라미란이 다음엔 어떤 인물로 돌아올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서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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