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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페미니즘 너머 이어진 여성 미술의 깊고 다기한 이야기들

등록 2020-02-14 10:49

연초 잇따라 열린 2개 여성미술전 화제
두산 갤러리에 펼쳐진 ‘노려보면 어쩔 것이냐’의 전시현장. 선채 오줌누는 여성을 담은 장지아 작가의 <오르메타>연작 영상이 보인다.
두산 갤러리에 펼쳐진 ‘노려보면 어쩔 것이냐’의 전시현장. 선채 오줌누는 여성을 담은 장지아 작가의 <오르메타>연작 영상이 보인다.
연초 미술판에서는 내용과 형식 측면에서 한층 진화한 두개의 여성 미술 기획전이 등장해 신선한 여운을 남겼다. 15일까지 열리는 서울 연지동 두산갤러리의 ‘노려본들 어쩔 것이냐’전과 지난 9일 마무리된 서울 소격동 아트선재센터의 ‘밤이 낮으로 변할 때’ 전이 화제의 작품마당이었다.

지난달 중순 시작한 `노려본들 어쩔 것이냐‘ 전은 제목대로 도전과 결기를 암시한다. 들머리 첫 작품부터가 벌거벗고 선 채로 소변을 보는 알몸 여성들의 당당한 영상이다. 바로 뒤엔 훨씬 큰 스크린에 알몸 남녀가 건배하며 만찬을 하거나, 결박된 알몸 남자가 여성 앞에 절규하는 등의 영상이 흘러간다. 가장 깊숙한 안쪽 벽엔 연인의 키스마크가 몸 여기저기 박힌 여성들의 큼지막한 누드 사진들이 정면 구도로 내걸렸다.

출품작들은 페미니즘 작가로 알려진 장지아씨가 2000년 이래 만든 근작, 구작들이다. 남성중심 가부장주의를 전복하고, 저항하는 의미로 해석되어왔던 역대 주요 작품들이 전시장에 한데 모였다. ‘노려본들 어쩔 것이냐’전은 이 작품들을 놓고 젊은 큐레이터 3명이 달라붙어 각자의 시선으로 뜯어보면서 의미망을 엮은 워크숍 기획전이다.

지난 2013년 처음 나온 작가의 빨간 드로잉 연작 문구에서 제목을 취한 전시는 작가의 몸과 텍스트 작업들에서 페미니즘 이외의 다른 의미들을 읽어내고 표출하려는 시도로 만들어졌다. 지난 1년간 전시워크숍을 벌여온 젊은 기획자 박수지, 박지형, 천미림씨는 2000년대 초반부터 현재까지 작가의 작업을 중심으로 페미니즘 일색의 주류적 해석을 재검토하고 확장시킬 수 있는 방법론을 질문하려고 했다. 육체 이미지 작업에 깃든 수행적 측면과 사랑 같은 감정의 문제들(박수지), 몸글에서 보이는 신체적 감각, 촉각성(박지형), 영상 사진 작업에서 재발견하는 컬트 미학 (천미림)을 보여주려고 했다고 이들은 전시장에 비치된 간이 설명서에 각각의 담론을 풀어놓았다. 사실 전시장을 살펴보면, 세 기획자가 각자 차별적으로 제시하는 지점이 무엇인지 실체를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격동하는 알몸의 동영상들이 한데 어우러져 내뿜는 감각의 활력이 도드라져 보이는 까닭이다. 관객은 오줌누는 여성의 동영상과 알몸남녀의 제의적 영상, 그 안쪽의 키스마크가 드러난 여성들의 누드 사진들이 잇달아 이어지는 시퀀스가 전시의 큰 줄기를 이루고 있음을 단박에 알게 된다. 옆 구석 벽면에 있는 드로잉과 작은 영상들은 몸에 대한 작가 특유의 감각을 좀더 세밀한 텍스트와 드로잉, 퍼포먼스의 맥락에서 바라보게 해준다. 소의 피로 쓴 문호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영문 시구절이 직물포 위에 쓰여진 설치작업이나 일상 속 이미지들과 그에 대한 단상을 빨간 글씨와 그림으로 끄집어 올린 빨간 드로잉들, 남성들에게 가래침을 맞고 머리채를 잡히면서 폭행을 당하는 작가의 작은 영상들이 그것이다.

이런 배치와 구성은 장지아 특유의 도발적 퍼포먼스의 직설을 넘어 또다른 측면에서 삶의 활력을 느끼게 한다. 불안하고 연약하지만, 여전히 살아있는 몸에서 전해지는 미묘한 낙관, 위안의 감정이 와닿는다는 점을 전시의 특장으로 새롭게 짚어낼 수 있을 것 같다. 지극히 인간적인 포즈로 서서 센 오줌발에 킥킥거리는 영상 속 여성의 모습들, 남성에게 폭행을 당하면서도 천연덕스레 웃는 장지아의 모습 등은 도발, 저항, 전복 등 페미니즘의 개념들을 넘어 살아있음의 또다른 징표로서 모종의 인간적 유대감을 느끼게 한다. “페미니즘은 작가 기저에 갖고 있는 태도이지 작품을 위한 도구가 아니었다”는 기획자 박수지씨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지난해 12월 28일부터 지난 9일까지 열린 아트선재센터의 기획전 ‘밤이 낮으로 변할 때’의 전시현장.
지난해 12월 28일부터 지난 9일까지 열린 아트선재센터의 기획전 ‘밤이 낮으로 변할 때’의 전시현장.
아트선재센터의 여성작가 5인 기획전 `밤이 낮으로 변할 때‘는 장지아 전시와 형식면에서 정반대의 구성이 흥미를 모았는데, 다기하고 복잡한 여성들의 서사를 섬세하게 표현했다는 점에서 기획의 묘미를 여실히 전해주었다. 2020년이란 에스에프 소설에 나옴직한 숫자의 새해로 바뀌는 시점을 기획자인 김해주 부관장은 주목했다. 이런 기년의 화두를 여성 작가들에게 제시하면서 지난 10월부터 2달간 함께 논의하며 연말 전시를 준비했다. 각기 시간의 변화 혹은 시간성을 어떻게 해석하는지를 회화, 사진, 설치작업, 영상 등으로 나타내 보이게 하고 각 출품작들을 전시장에서 서로 유기적으로 얽히게 했다. 얼핏 보면 예쁜 꽃들이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현실에서 나올 수 없는 색상과 모양새를 지닌 강은영 작가의 허구적인 화원 작업, 그림을 그린 시간과 온도를 감지하게 하는 이혜인 작가의 꽃밭 풍경화 연작, 그리스 신화의 남성 가해자를 응징하는 도상을 조형물로 만든 윤지영 작가, 암울한 공간에서 탈출하기 위한 아르피지 게임이나 새의 위태로운 날갯짓을 담은 송민정 작가의 영상세계, 압축되거나 과장된 조각 사진들의 이미지를 전시장 곳곳에 놓아 시선과 매체의 새로운 실험을 지속하는 안초롱 사진가까지 출품작들은 깊고 복잡한 여성 작가들의 작업들을 하나의 큰 이야기틀로 차분하게 엮으면서 풀어갔다.

특히 전시장 안쪽에 설치한 망루 모양의 관람 구조물은 다른 전시에서 보지 못했던 창의적인 성과물이라 할 만하다. 망루는 아르피지 생존 게임을 소재로 한 송 작가의 디스토피아적 영상이 흐르는 상영실을 품고 있는데, 계단을 올라가면, 눈보라 날리는 허공에서 제자리를 맴돌며 위태롭게 날갯짓하는 새의 모습을 담은 작가의 또다른 영상물 <윈도우>를 천장에 달린 모니터를 통해 지켜보게 되는 얼개를 띠었다. 높은 망루 공간에서 새의 날갯짓을 담은 모니터를 보면서, 모니터 뒤쪽의 벽이 아니라 다른 작가들의 작품이 펼쳐진 전시장 전체까지 두루 조망하게 한 공간 구성은 지금도 여전히 불안하고 흔들리는 여성들의 상황을 암시하고 상징한다. 여성서사의 전시를 페미니즘으로 단순화하거나 상투화하는 기존 여성미술전의 틀을 벗어나 복잡하고 깊은 여성 작가 내면의 이야기들을 독창적인 큐레이팅으로 드러냈다는 점에서 전시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냈다는 평가가 나왔다. 참여 작가들은 “전시를 준비하고 체험하는 내내 따듯하고 진솔한 연대의 느낌이 우러나왔다”고 입을 모았다. 글· 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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