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모른다>에 강력계 팀장으로 출연한 김서형. 에스비에스 제공
목을 맨 주검을 본 남자가 깜짝 놀란다. 상황을 정리하는 여자의 목소리. “선생님은 나가 계세요.” 남자를 보호하고 당당하게 사건 현장으로 들어가는 여자는 강력계 형사 차영진(김서형)이다. 지난 2일 시작한 <아무도 모른다>(에스비에스)에서는 김서형을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 강력계 팀장으로 내세워 17년 전 벌어진 연쇄살인사건을 파헤친다.
연쇄살인마를 쫓는 형사는 드라마의 단골 주인공 중 하나지만, 최근에는 극 중 젠더 체인지가 활발해지면서 여형사가 범죄수사물 장르의 새로운 전환점을 만들고 있다. 그동안 드라마 속 형사계는 남자들의 독무대였다. ‘남자 형사+여자 기자(혹은 프로파일러)’ ‘선배 남자 형사+후배 여자 형사’ 식의 조합으로 여자들은 주로 조력자 역을 맡았다. 하지만 <아무도 모른다>의 차영진은 강력1팀장으로서 예리한 감각으로 단서를 잡고, 몸을 던져 범인을 검거하는 등 사건을 진두지휘한다. 결정적인 순간 나타난 남자가 구해주는 ‘무늬만 형사’가 아니다.
<본 대로 말하라>에서 광역수사대 팀장으로 출연한 진서연. 오시엔 제공
차영진 외에도 요즘 주체적인 여자 형사가 안방 드라마를 휘어잡고 있다. 2016년 <시그널>의 차수현(김혜수), 2007년 <히트>의 차수경(고현정) 등 앞선 시도가 있었지만, 최근 들어 ‘여형사 드라마’가 잇따르고 있어 눈길을 끈다.
여형사를 앞세운 드라마는 올해만 7편 남짓 방영 중이거나 방영을 앞뒀다. 지난달 1일 시작한 <본 대로 말하라>(오시엔)도 광역수사대 팀장 황하영(진서연)과 프로파일러 오현재(장혁)의 조합이다. 황하영이 판을 설계하고 전면에 나서 살인범을 쫓는다. 11일 시작한 <메모리스트>(티브이엔)에서 이세영은 프로파일러이자 역대 최연소 총장 한선미로 등장한다, 4월 방영 예정인 <더 킹: 영원의 군주>(에스비에스)에서도 김고은이 강력반 형사 정태을로 나오고, 하반기 예정된 <악의 꽃>에서 문채원의 직업 역시 강력계 형사다. 12일 종영한 <더 게임: 0시를 향하여>에서도 서준영(이연희)은 중앙서 강력1팀 형사이자 데스크 반장이었다. 형사는 아니지만, 여성이 사건 해결의 중심에 서는 경우도 늘었다. 하반기 방영하는 <써치>에서는 특전사 대테러팀장 출신 김다정(문정희)과 육군 중위 손예림(정수정)이 최정예 수색대에 합류해 비무장지대 살인사건을 파헤친다.
4월 방영 예정인 <더 킹: 영원의 군주>에서 강력반 형사로 출연한 김고은. 에스비에스 제공
전문가들은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을 넘어 남녀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최근의 흐름이 드라마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한다. 드라마 속 여성은 힘든 환경을 꿋꿋이 견디는 ‘캔디’에서 검사·판사 등 전문직으로 점차 변화했다. 이어 <밀회>(2014)처럼 예술재단 실장(김희애)이 무명의 천재 피아니스트(유아인)를 키워내는 방식의 관계역전도 벌어졌다. 이런 흐름이 ‘걸 크러시’를 뽐내는 여성을 동경하는 사회적 분위기와 맞물려 강력사건을 진두지휘하는 형사에까지 이른 것이다. 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는 “일 잘하는 여형사의 등장은 시대적 흐름이다. 과거에는 그런 역할을 주는 것에 그쳤다면, 이제는 서사까지 뒷받침된 드라마가 등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젠더에 얽힌 사건이 늘면서 이를 여성의 시선으로 그려 공감도를 높이는 등 범죄수사물이 새롭게 진화하고 있다”고 짚었다.
12일 종영한 <더 게임: 0시를 향하여>에서 강력팀 형사로 출연한 이연희. 문화방송 제공
실제로 여형사의 활약을 내세운 드라마는 지금까지의 범죄수사물과 다른 지점이 많다. 냉철하게 판단하고 발로 뛰어 사건을 해결하는 것에 더해 디테일한 감정선을 그려낸다. <더 게임>에서 서준영이 납치·감금된 여고생과 통화하며 “언니가 꼭 널 찾아낼게”라고 안심시키는 장면은 기존 수사물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덧댄다. <아무도 모른다>는 차영진과 아랫집 소년 사이의 유대감을 강조한다. 이 드라마의 이정흠 피디는 “남성 서사가 대부분인 범죄수사물에서 여성 중심 서사를 보여주고 싶었다. 기존에는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 속 박진감 넘치는 장면이 중심이었지만, <아무도 모른다>는 유대관계가 이야기의 중심축이 된다”고 말했다. 다양한 여자 캐릭터를 등장시켜 여성 간의 연대와 계승을 드러내기도 한다. <아무도 모른다>에서는 윤자영(강예원) 등 여자 후배들이 “모든 계급을 특진으로 올라간 차영진 팀장님처럼 되고 싶다”며 열의를 다지는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황진미 평론가는 “과거 드라마에서는 여성의 수가 적어서 현재의 위치에 오르기 위해 겪어온 치열한 경쟁을 강조했다면, 이젠 그 수가 늘면서 연대와 존경, 계승의 서사를 배치하고 있다”고 말했다.
내적·외적인 매력을 동시에 발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여배우들도 형사 역에 욕심을 낸다. 이세영은 제작발표회에서 “그간 민폐만 끼치는 여자 주인공이 많았는데, 남자 주인공과 함께 극을 끌고 간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고 말했다. 진서연도 “장르물에선 역할보다 배우가 보일 때가 많다. 진서연보다 황하영 팀장이 보였으면 하는 마음에 현장감 있게 거칠게 분장했다”고 말했다.
남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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