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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모른다’…여배우의 재발견, 뒤집은 젠더 구도

등록 2020-03-27 18:03수정 2020-03-28 02:03

황진미의 티브이 톡톡

에스비에스 제공
에스비에스 제공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제목이 스포일러이다. 드라마가 중반에 들어섰지만, 사건의 윤곽을 알 수 없다. 처음에는 사이비 광신도의 연쇄살인 사건을 쫓는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학교폭력으로 서사의 중심이 옮겨지더니, 지금은 교회와 학교를 아우르는 복지재단을 통해 두 사건의 연결점을 풀어내고 있다. 뭔가 큰 그림이 있는 듯하지만, 사건과 장면들의 이음매가 치밀하지 않아 갈수록 긴장감이 떨어진다. 하기야 서로 무관해 보이던 사건들의 연결점이 드러나고, 마침내 큰 그림을 보여주는 서사가 성공하려면 치밀한 짜임새와 집중된 연출이 필요하다. <비밀의 숲>(티브이엔, 2017)이나 <붉은 달, 푸른 해>(문화방송, 2018)와 같은 수작들이 존재하지만, 섣불리 도전하긴 힘들다.

장르적인 만듦새는 다소 실망스럽지만, 장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첫째는 차영진 캐릭터이다. 도회적인 외모와 중저음의 목소리가 매력적인 김서형은 오랫동안 <아내의 유혹>(에스비에스, 2008)의 악녀 이미지에 갇혀 있었다. 앞서 영화 <여고괴담 4-목소리>(2005)에서 보았던 서늘한 이미지의 김서형을 기억하는 사람으로서는 아쉬움이 컸다. 그러나 페미니즘이 새롭게 불붙기 시작한 시기에 나온 드라마 <굿와이프>(티브이엔, 2016)에서 유능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로펌 대표로 출연한 김서형은 시대가 원하는 강하고 멋진 여성의 이미지를 제시하였다. 이후 영화 <악녀>(2017)와 드라마 <스카이 캐슬>(제이티비시, 2018)을 거치면서 ‘범접할 수 없는 조련사- 김서형’의 이미지가 여성 시청자들의 뇌리에 자리 잡았다. ‘전적으로 그를 믿고 싶은’ 여성 시청자들은 그를 주인공으로 삼은 형사물이 보고 싶다는 아우성을 인터넷에 올렸고, 마침내 그것이 이루어졌다.

에스비에스 제공
에스비에스 제공

요컨대 <아무도 모른다>(에스비에스)의 차영진 캐릭터는 제한된 기회로 평가절하당하던 여배우의 재발견이자 ‘아래로부터의 요구’가 관철된 결과물이다. 크고 마른 체형에 헐렁한 외투만 입어도 ‘간지’가 폭발하는 독보적인 화보가 완성된다. 최고의 실력으로 특진을 거듭하여 광역수사대 강력계 경감이 된 그는 19년째 한 사건을 쫓고 있다. 청소년기에 여성 연쇄 살인사건으로 단짝 친구를 잃은 그는 범인의 간교한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경찰이 되어, 일 중독 상태로 살아간다. 드라마에는 차영진을 롤 모델로 삼고 싶어 하는 젊은 여성 후배가 등장한다. 이는 차영진 캐릭터를 향한 젊은 여성들의 지지와 성원을 대변하는 것이다. 과거엔 집념에 가득 찬 여성 전문직 캐릭터가 드물기도 했거니와, 그런 캐릭터에게 악녀, 마녀, 독하다, 드세다, 여자로서 매력이 없다는 등의 ‘후려침’이 얹혔던 것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다.

둘째는 남성에 대한 재현이다. 고은호(안지호)는 혼자 사는 차영진의 이웃 소년이다. 어린 시절 엄마를 때리는 남자를 제압해준 차영진을 존경하는 소년은 차영진의 집에 드나들며 음식을 채워주고, 화분에 물을 준다. ‘살림형 이웃남’인데다, 범죄를 저지르려는 친구들을 말리고, 심지어 행인의 목숨을 구해준다. 고은호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을 수사하러 차영진이 나서는데, 이는 영화 <아저씨>(2010)에서 소녀를 구하는 ‘옆집 아저씨’의 구도를 뒤집은 거울상이다. 한편 이선우(류덕환)는 고은호의 담임교사로, 차영진의 조력자 노릇을 한다. 그는 이사장 집안에 속한 ‘금수저’이지만, 체구도 작고 힘도 약하다. 그의 유약함은 차영진의 강인함과 대비된다. 결국 그가 죽을 뻔한 순간에 차영진이 나타나 구해주는데, 이는 기존 드라마들의 젠더 구도를 완전히 뒤집은 것이다.

셋째, 보호받지 못하는 아이들의 문제를 환기하며, 교회, 사학, 복지재단 등 사목 권력에 대한 관심을 촉구한다. 불안정한 싱글 맘의 아들인 고은호는 제집보다 차영진의 집에서 안식을 얻는다. 강요가 심한 부잣집 아들인 하민성은 운전기사의 집에서 더 편안함을 느낀다. 주동명은 부모나 교사에게서 느끼지 못한 존경심을 아동청소년계 형사에게서 처음 느낀다. 오두석은 자신을 믿지 못한 교사 대신 백상호(박훈)를 믿고 따른다. 그가 범죄자라 할지라도 자신이 의지할 사람은 백상호뿐이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소설 ‘자기 앞의 생’을 언급하며, 모모와 로자 아줌마처럼 피가 섞이지 않은 관계라도 우정과 연대가 가능함을 강조한다. 또한 교회와 사학과 복지재단을 조명하며, 이들이 지닌 막대한 재산과 긴밀한 관계에 대해 암시한다. 요컨대 드라마는 교회에 깃든 광신과 사학에 깃든 비리, 그리고 복지재단의 탈을 쓴 범죄조직에 대해서도 강한 암시를 던지는데, 이는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지닌다. 교회와 사학과 복지재단은 가족이나 국가가 돌보지 못하는 지점을 흡수하는 사회의 한 분야이지만, 그것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를 일깨우는 것이다. “좋은 어른을 만났다면 내 인생은 달라졌을까?”라는 백상호의 자문은 묘한 여운을 남긴다. 미성년자 성착취 영상 유포 사건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한 가운데, 좋은 어른이 된다는 것의 의미가 참혹하게 다가온다.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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