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 시인 장석씨
“이제 신인이죠. 저는 지금 신인의 심장을 가지고 있어요. 행복하고 설렙니다.”
지난 3일 서울 종로구 서촌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사무실에서 만난 시인 장석(63) 작가의 말이다. “그제 어느 문학 계간지로부터 처음으로 시 청탁도 받았어요. 이달 말까지 두 편을 써야 해요.”
작가는 최근 생애 첫 시집 두 권을 한꺼번에 냈다. 서울대 국문학과 3학년이던 1980년 벽두에 시 ‘풍경의 꿈’이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뽑힌 지 40년 만이다. 두 시집 중 <우리 별의 봄>은 최근 3년 쓴 시를, <사랑은 이제 막 태어난 것이니>는 그 전에 쓴 시를 담았다.
작가의 첫 시집 출간을 두고 여기저기에서 박수 소리가 우렁차다. 장석주 시인은 어느 매체에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후루룩 앉은 자리에서 시집 두 권을 통독하고 멍하니 앉아 있었노라고 고백했고 이승하 시인은 “나는 한낮의 하늘에 부조되는 장엄한 무늬를/ 보았다”로 시작하는 ‘풍경의 꿈’은 80년대 신춘문예 당선 시 중 최고였다고 찬사를 보냈다.
시인은 지금 작가 말고도 직함 두 개가 있다. 경남 거제시 둔덕면에 자리한 굴 생산업체 중앙씨푸드 대표와 문명교류학자 정수일 선생이 세운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이사장을 맡고 있다. 대안학교인 이우학교 이사장도 2003년 학교 설립 초기부터 12년 동안 맡았다. 시단과 거리를 두었을 뿐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생활인과 시민의 삶을 살아온 것이다.
서울대 국문학과 77학번인 시인은 85년 졸업장을 받고 바로 부친이 개척한 통영바다 ‘굴밭’으로 내려갔다. 수산전문학교를 나와 옛 수산청에서 오래 근무한 부친은 69년 거제에 굴생산업체 중앙수산을 세웠다.
시재가 드높았던 청년은 왜 시인의 칭호를 얻고 바로 시를 내려놓았을까. “80년 4월 입대하고 2년 뒤 여름에 복학해 선배들과 문학 무크지 <문학의 시대>를 내려고 준비했어요. 제가 시 쪽을 맡아 원고 청탁도 하고 받으러 다녔어요. 그런데 문제는 스스로 시 쓰는 삶을 살겠다고 서원한 제가 시를 쓰기 힘들었어요. 70년대에도 참여시가 있었고 민중문학이란 말을 쓰기도 했지만 군대를 다녀와 보니 그 결과 층위가 많이 달라져 있더군요. 혼란과 혼돈이 있었죠. 저 자신도 머릿속으로는 사회 참여적이라고 생각했지만 강한 (민중)시를 쓰는 데 어려움이 있었어요. 83년 어느 날부터 학교에 가는 대신 세상을 떠돌아다녔어요.”
하지만 그는 시와 멀어진 책임은 시대가 아니라 자신에게 있었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 시대가 저에게 시를 못 쓰게 한 게 아니라 저의 나약함이나 결핍 때문에 용기를 내지 못한 거죠. 제가 문학적으로 미성숙했죠. 그 과정을 거쳐 깨지기도 하고 비판도 받고 그러면서 지금 제 시의 형식을 튼튼하게 갖추었다고 생각해요.”
부친은 1999년 별세했다. 그 뒤 시인이 굴 농사 책임자가 됐다. “직원이 30여 명입니다. 부친이 돌아가셨을 때보다 2배 늘었죠. 화·수·목요일에는 거제에서 일하고 다른 날에는 영업사무소가 있는 서울에 있죠.”
시집엔 그가 지금껏 쓴 시의 3분의 1가량을 담았다. 그가 마주하는 존재들에 대한 사랑 그리고 세계의 본질에 가닿으려는 열망이 시편에서 뜨겁게 흘러내린다.
그는 규정상 어쩔 수 없어 퇴임해야 하는 이우학교 행정직 직원 앞에 이런 시구를 띄운다. “아직도 어리디어려 보이는/ 나의 선생님 (중략) 사나운 이 세상에서/ 우리가 서로를 지키는 울타리와 버팀목으로/ 턱없이 모자람이 참 슬픕니다”(시 ‘윤영석 선생을 보내며’ 중) “사람과 사람/ 사람과 섬/ 섬과 섬에는/ 사이가 있고 (중략) 사이에는 바람이 있고/ 기도가 있고/ 그리움과 친밀함이 항해한다”(시 ‘사이’ 중) ‘사이’에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고 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 시도 바다라는 공간에서 태어났죠. 저는 바다에 신세 지는 삶입니다. 제 일이 바다에 기대는 농사이거든요. 바다는 제가 사람 그리고 자연과 같이 만나는 공간이죠. 저는 일을 시키는 자본가이기도 하지만 일하는 사람들과 하나의 관계 속에서 만납니다. 그곳의 삶이 행복해요.” 자연과 하나 되어 사람 사는 이치를 궁구하는 시구들도 독자의 시심을 부풀린다. 예컨대 이런 노래다. “산수유꽃 언덕에 나도 피어/ 노랗게 바라보리라”(시 ‘언덕에서’ 중)
80년 등단 40년 만에 시집 두권
“이제 신인…행복하고 설레어
생활에 단단히 발 디뎌야 좋은 시” 85년부터 통영 바다서 ‘굴 농사’
이우학교 초기부터 이사장 12년
현재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이사장 싱싱하고 맛있는 굴을 생산해 이웃에 기쁨을 주는 것도 시인의 일과 다른 것 같지 않다고 하자 시인의 답은 이렇다. “생활에 단단히 발 딛고 있을 때 좋은 시가 나옵니다. 젊었을 때는 생활이 몸 안에 있을 수 없죠. 천부의 감성으로 좋은 시를 만들 수는 있지만요. 엊그제 화병에 꽂힌 튤립을 오래 바라보았어요. 지나치게 화려하더군요. 흙을 파고들 뿌리가 없는 꽃은 땅에 기대는 꽃들과 달라요. 굴농사를 하며 만나는 동료들은 시를 쓰는데 가장 중요한 동력입니다. 가장 고마운 분들이죠. 제가 젊었을 때 만난 민중이란 말이 허황하고 잘못된 게 아니었어요.”
10년 가까이 시를 밀어내다 아이를 키우면서 다시 시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되었단다. “20대엔 시를 쓰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시상이 떠오려면 술을 먹든지 해서 일부러 밀어냈어요. 그러다 시가 돌아왔죠. 87년 결혼하고 88년과 90년 두 딸을 얻었어요. 아이들이 자라면서 93년 무렵부터 동화와 동시를 만들어 들려주었죠. 94년 막내를 얻기 전후에, 이 아이들도 시를 아는 삶을, 시를 모른다는 일은 부끄러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커졌죠. 저 자신도 시 쓰는 일이 절실해져 다시 시를 썼죠.”
그 뒤로는 메모광이 됐단다. 그의 호주머니에는 늘 무언가를 적은 종이가 수북하다. 시가 오는 순간을 절대 놓치지 않으려고 아무 때나 아무 곳에서나 메모해서다. 휴대 전화로 녹음도 한다. “잠을 자다가도 시상을 만나면 꼭 일어나 메모해요. 나이 들어 시 쓸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절실함도 있죠.”
왜 시를 쓰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받았다. “그런 질문이 시를 만들어요. 시인은 늘 스스로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나, 내가 지금 하는 행위는 뭔지 물어야 합니다. 그게 시를 만드는 동력이죠. 시는 질문으로 꽉 차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자기와 자기가 있는 세상에 대해 질문해야 합니다. 그 답 자체가 시가 아니라 답에 가까이 가는 과정이 시이죠.”
중학 시절에 시쓰기를 시작했단다. 부산에서 태어난 시인은 부친의 전근으로 초등 3학년 때부터 서울 생활을 했다. “중학교 때 국어 시간이 특별히 좋았어요. 선생님이 수업에서 15분 정도는 학생들을 일으켜 세워 교과서를 읽게 했어요. 제 차례가 되어 잘 읽으면 칭찬해주시고 한 번 더 읽어보라고 하셨죠. 그게 참 좋았어요. 그때부터 자연스럽게 시에 관심을 갖게 되었죠.”
그는 고 노회찬 의원과 경기고 1·2학년을 같은 반에서 보냈다. 정광필 이우학교 초대 교장도 경기고 1학년 급우다. 재작년 “각별한 친구” 노회찬 의원이 세상을 떴을 때 직접 조시 ‘여진으로 해일로 우리는 간다’를 써 영결식에서 낭송했다. 이 시는 “너는 아주 빠르게 내려왔다”로 시작해 “너의 여진으로/ 해일로 몰려가는 우리를 보아라”로 끝난다.
그가 다시 시를 붙들게 된 데도 고인의 격려가 힘이었단다. “노 의원은 제 시의 아주 드문 독자였어요. 그는 노동운동을 거쳐 진보 정치로 가고 저는 바닷가에서 굴농사를 할 때 가끔 만나면 왜 시를 쓰지 않느냐, 시 한번 보자고 했죠. 시를 보여주면 꼭 코멘트를 하고 몇 편은 자신의 에스앤에스에 올리기도 했었죠.”
그는 친구 회찬을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을 이렇게 떠올렸다. “좀 특별했죠. 친구이면서도 어른 같았어요. 회찬이가 재수해 입학했거든요. 조숙했죠. 아는 것도 많고 표현도 잘했어요. 쉬는 시간에 친구들이 회찬이 옆에 모여 재미난 이야기를 들었죠. 단순 우스갯소리가 아니었어요. 회찬이는 독서도 많이 하고 생각도 깊어 친구들과 여러 이야기를 많이 나눴어요.” 그가 보는 정치인 노회찬은 이렇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품위를 갖추고, 높은 수준에서 우리 사회의 희망을 이야기한 사람입니다. 말과 삶이 일치했어요. 사람됨이 그럴만했어요.”
그가 2년 전 이사장을 맡은 한국문명교류연구소와의 인연도 고인의 권유로 시작되었다. “2006년 노 의원이 제안해 정수일 선생님을 모시고 실크로드 답사 여행을 했어요. 그게 시작이었죠. 답사의 기쁨과 감동이 무척 컸어요. 정 선생님의 인간적 매력에 더해 그분이 특별한 영역에서 학문을 개척하는 의미도 컸고요. 그런 걸 떠나 정 선생님은 미래의 통일을 위해서라도 소중한 분입니다. 오래 뵙고 모실수록 그런 마음이 커집니다.”
3집 계획을 묻자 시인은 내년 봄에는 낼 생각이라고 했다. “지난해 11월 원고를 출판사에 넘긴 뒤 새로 쓴 신작들도 모이고 두 시집에 넣지 못한 구작들도 쌓여 되도록 내년 봄에는 내려고요. 저는 지금, 시작에 머물지 않고 발표와 출간을 통해 시를 독자와 사회에 전달해야 살아 있는 시인이라는 점을 늦게 자각하고 있는 신인이죠.”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장석 시인. 그는 김수영과 이성복의 시를 좋아한다고 했다. 강성만 선임기자
<사랑은 이제 막 태어난 것이니> 표지
<우리 별의 봄> 표지
“이제 신인…행복하고 설레어
생활에 단단히 발 디뎌야 좋은 시” 85년부터 통영 바다서 ‘굴 농사’
이우학교 초기부터 이사장 12년
현재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이사장 싱싱하고 맛있는 굴을 생산해 이웃에 기쁨을 주는 것도 시인의 일과 다른 것 같지 않다고 하자 시인의 답은 이렇다. “생활에 단단히 발 딛고 있을 때 좋은 시가 나옵니다. 젊었을 때는 생활이 몸 안에 있을 수 없죠. 천부의 감성으로 좋은 시를 만들 수는 있지만요. 엊그제 화병에 꽂힌 튤립을 오래 바라보았어요. 지나치게 화려하더군요. 흙을 파고들 뿌리가 없는 꽃은 땅에 기대는 꽃들과 달라요. 굴농사를 하며 만나는 동료들은 시를 쓰는데 가장 중요한 동력입니다. 가장 고마운 분들이죠. 제가 젊었을 때 만난 민중이란 말이 허황하고 잘못된 게 아니었어요.”
장 시인의 일터인 통영 바다 ‘굴밭’ 모습. 장석 시인 제공
장 시인이 키운 굴에는 ‘숨굴’ 브랜드가 달린다. 장석 시인 제공
연재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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