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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최백호 ‘낭만에 대하여’…우울한 계절, 우리가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등록 2020-04-17 17:26수정 2020-04-19 21:57

[이재익의 아재음악 열전]

<한겨레> 자료사진
<한겨레> 자료사진

정말 몰랐다. 매일 아침 두 시간씩 시사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필자조차도,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이토록 오래 지독하게 인류의 숨통을 죌 줄 예상 못 했다. 1월 중순쯤 스쳐 지나가는 단신 뉴스였다. 중국에서 전에 없던 폐렴 증상을 보이는 환자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만 해도 그냥 남의 나라 이야기인가 보다 했다. 그로부터 석 달이 지난 지금…, 인간의 세상은 멈춰버렸다.

국가와 인종을 가리지 않고 수백만명이 감염됐고 십만명이 넘게 사망했으며, 그 수는 지금도 늘어나고 있다. 통계에 잡힌 수치가 이 정도.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 남미나 인도, 아프리카 대륙 빈민가에서 감염되고 죽은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 인도네시아의 경우 3월 한달 동안 수도 자카르타에서 코로나19로 사망한 사람이 95명이라고 발표했지만 전달보다 3월 장례 건수가 2000건 가까이! 폭증했다고 한다. 공식 발표된 숫자의 20배에 달하는 갑작스러운 죽음이라니. 우연일까? 그나마 우리나라는 성공적으로 막아내고 있는 편. 미국이나 유럽에서 일상이 되어버린 공포영화 같은 장면이 눈앞에서 벌어지지 않으니 감사할 따름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제 구조상 계속 문을 걸어놓고 살 순 없다. 타국의 고통은 결국 우리에게 고스란히 전이된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인종을 가리지 않지만 연령은 가린다. 전 연령층에 걸쳐 감염과 발병, 사망이 일어나고 있다 해도 치명률은 나이에 따라 확연히 다르다. 사망자 중에 30대 이하 청년층이 사망한 경우는 1%도 안 되는 데 반해 노인층의 치명률은 10%가 훌쩍 넘도록 무시무시하다. 그러다 보니 사회적 거리두기 캠페인에서도 연령에 따른 참여도가 다르다. 원래도 청년보다 활동성이 떨어지는 노인들은 이제 코로나라는 감옥에 갇혀버린 신세가 되었다. 가족 간 감염이 매우 우려되는 상황에서 자식들과의 식사나 모임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더욱 안타깝게도 노인들은 집안에서 누릴 수 있는 디지털 문명에서도 소외된다. 개인차는 있겠지만 대부분 노인은 스마트폰을 비롯한 아이티(IT) 기기들로 누리는 쇼핑과 문화생활을 낯설어한다. 필자도 지난주에 부모님 댁에 가서 스마트폰 화면을 거실 티브이에 연결하는 방법을 적어드리고 왔는데, 돌아오는 길에 왈칵 눈물이 났다. 아니 그게 뭐라고, 어찌나 좋아하고 신기해하시는지. 미리 챙겨드릴걸. 불효자가 따로 없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무엇일까. 디지털 소외처럼, 새로운 것들을 익히기 어려워지고 활동이 점점 줄어드는 정신적·육체적 쇠퇴뿐일까? 지혜가 쌓이는 과정이라고 한다면 너무 미화하는 표현일까? 25년쯤 전, 당시 분당에 살던 여자친구를 바래다주고 혼자 862번 버스를 타고 세곡동 근처를 지날 때쯤이었다. 최백호의 신곡이라며 디제이가 ‘낭만에 대하여’를 들려주는데, 겨우 스물이 갓 넘은 내 마음으로 흘러들어왔다. 밤늦은 항구의 옛날식 다방에서 곱씹는 사랑과 이별. 도라지 위스키 한 잔. 나이가 든 사람의 것들만을 노래하는 목소리가 왜 푸릇푸릇한 스무살 청춘을 사로잡았을까? 심지어 그때 나는 온통 팝 음악에 매몰되어 가요는 아예 듣지도 않던 시기였는데. 아직도 그 기묘한 순간의 감각이 생생하다.

한참 세월이 지나 방송국 피디가 되어 최백호 선생을 자주 뵙게 되었다. 우리 가요사의 산증인이랄까. 비슷한 연배로 치자면 김창완 선생 정도가 계시는데 마침 두 분 다 우리 방송국에서 본인의 이름을 건 프로그램을 맡고 있다. 이런 영광이! 가수로서도 진행자로서도 둘의 스타일은 정반대. 빈센트 반 고흐가 그린 구두의 실제 주인이 누구냐를 놓고 제멋대로 떠들어댔던 철학자들처럼, 고작 스치듯 이야기를 나누고 두어번 술잔을 기울인 경험으로 인물 비평을 하자면 이렇다. 김창완의 영혼은 나이를 튕겨내고 최백호의 영혼은 나이를 머금는다. 목소리부터가 그렇다. 김창완의 음성은 여전히 소년 같고 표정도 장난기가 넘친다. 그러나 최백호의 음성은 70년 삶의 무게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특히 어반자카파나 에코브릿지 같은 젊은 가수들과 함께 노래할 때면, 젊어서는 결코 가질 수 없는 연륜이 더 잘 드러난다. 그의 노래는 깊고 현명하게 흐르는 강과도 같다. 마른 대지를 넉넉히 적셔주는 강. 느리게 흘러야 할 때와 콸콸 넘쳐 흘러야 할 때, 가만히 고여 있어야 할 때를 아는 강. 스무살의 나도 그 유려한 물결에 꼼짝없이 휘감겼던 게지.

이번 칼럼을 쓰면서 찾아보니 최백호 선생이 다시 못 올 것들에 바치는 명곡 ‘낭만에 대하여’를 발표했던 때가 25년 전, 딱 지금 필자 나이인 마흔여섯이었다. 이 곡의 노랫말 속에 늙는다는 현상의 본질이 들어 있다. 올 것들보다 다시 못 올 것이 많아지는 것. 그것이 늙음이 아닐까. 그런데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어르신들에게 몇 번 남지 않은 봄을 통째로 앗아가 버렸다. 다음 계절을 지켜내기 위해서라도 우리 조금만 더 답답해지자.

최백호 선생이야 워낙 유명한 노래들이 많기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노래를 한 곡 추천한다. 역시 전설의 반열에 오른 가수 주현미와 함께 부른 ‘풍경’. 해 저무는 저녁에 이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몇 번 남지 않은 계절을 음미하는 먼 훗날의 내 모습이 떠올라 뭉클해진다.

이재익 ㅣ 에스비에스 라디오 피디·<정치쇼>,<뮤직쇼>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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