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석은 이내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 당시 공권력의 폭압적인 강압수사로 청력을 잃은 피해자(윤상호)가 가해자가 누구냐고 묻는 이에게 ‘바로 당신’이라고 지목하는 대목에서다. 유쾌하던 분위기는 긴장감에 휩싸이고, 이야기는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간다. 지난 22~26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오른 연극 <흑백다방>은 민주화운동의 피해자와 가해자의 이야기를 통해, 시대의 아픔과 분노를 화해와 희망으로 이끈 작품이다.
이 작품은 또 다른 의미에서 우리 사회에 희망의 메시지를 던졌다. 코로나19 여파로 멈춰 섰던 공연계에 시동을 건 작품이기 때문이다. 서울 예술의전당이 자유소극장에 연극을 올린 것은 지난 2월2일 이후 80일 만이다. 22일 찾은 공연장에서는 입장에 앞서 문진표를 작성한 관객들이 모두 마스크를 착용하고 객석 앞뒤, 옆으로 한 칸씩 띄워 앉는 방식으로 거리를 두고 연극을 관람했다.
꽃샘추위가 물러가면서 완연한 봄이 온 것처럼, 코로나19로 긴긴 겨울을 보낸 문화계에도 봄볕이 스미고 있다. 사실상 올스톱됐던 공연들이 제한적으로 재개되고, 개봉이 미뤄졌거나 제작이 중단됐던 영화들도 하나둘 개봉 일정을 확정하거나 촬영에 들어가는 상황이다. 가수들 역시 미뤄온 음반·음원을 발표하며 속속 돌아오고 있다. 코로나19 신규 확진자가 눈에 띄게 감소하면서 그동안 위축됐던 문화계가 조심스레 몸풀기에 나선 분위기다.
공연계 상황은 대부분의 일정이 취소됐던 3월과 확연히 다르다. 초연 뮤지컬 <차미>와 <리지>가 각각 14일, 2일 개막했고, 코로나19 확진자 2명이 나오며 중단됐던 대형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도 지난 23일 공연을 재개했다. 5월에는 기대작이 연이어 찾아온다. 차지연이 주연하는 라이선스 초연인 모노극 <그라운드디드>가 5월14~24일 무대에 오르고, <렌트>(6월16일~8월23일)와 <모차르트>(6월11일~8월9일> 등 굵직한 뮤지컬도 줄줄이 선을 보인다.
연극 <흑백다방>의 한 장면. 극단 후암 제공
한국 영화도 하나둘씩 개봉을 준비하고 있다. 선두에는 오는 29일 개봉하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흑백판이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개봉이 연기된 지 두달 만에 관객을 만난다. 같은 날 이세영·박지영 주연의 공포 영화 <호텔 레이크>도 개봉한다. 오는 30일 개봉하는 <저 산 너머>는 김수환 추기경의 7살 소년 시절을 담은 극영화다. 정웅인 주연의 <슈팅걸스>는 새달 6일 극장에 걸린다. 2009년 단 13명의 부원으로 전국축구대회에서 우승한 전북 완주 삼례여중 축구부와 고 김수철 감독의 감동 실화를 그렸다. 송지효·김무열 주연의 <침입자>도 새달 21일 개봉한다.
멈춰 섰던 촬영장도 다시 돌아간다. 전세계에서 코로나19가 확산되면서 국외 촬영이 어렵자 국내 촬영부터 재개하고 있다. 황정민·현빈 주연의 <교섭>, 송중기·이희준 주연의 <보고타>, 최동훈 감독의 신작 <외계인>, 마동석 주연의 <범죄도시 2> 등이 촬영에 이미 들어갔거나 곧 들어갈 예정이다.
29일 개봉하는 영화 <기생충> 흑백판. 씨제이(CJ)엔터테인먼트 제공
가요계 역시 조금씩 활기를 찾는 분위기다. 수백명의 사람이 모일 수밖에 없는 콘서트는 여전히 열기 힘든 상황이지만, 음원·음반 발매나 가수들의 컴백 움직임은 잇따르고 있다.
특히 아이돌의 컴백 릴레이가 눈에 띈다. 그룹 갓세븐은 지난 20일 새 앨범 <다이>(DYE)를 내놓고 활동을 시작했다. 오마이걸과 가수 청하는 27일 새 앨범을 낼 예정이다. 엑소의 백현은 다음달 솔로로 컴백하고, 워너원 출신의 가수 박지훈도 다음달 새 앨범을 발표한다. 5월11일에는 남성 아이돌 그룹 세팀이 맞붙는다. 그룹 몬스타엑스, 뉴이스트, 데이식스가 같은 날 컴백하면서 팬들의 관심이 쏠린다.
발라드 가수들도 복귀를 알리고 있다. 가수 성시경은 지난 17일 생일을 맞아 자신의 에스엔에스(SNS)를 통해 라이브 방송을 하며 “신곡이 5월3일 공개된다”고 밝혔다. 그는 “(코로나19로 앨범 발매) 시기를 봐야 했다”며 “거꾸로 생각하면 잘된 것 같다. 여유를 갖고 더 많은 노래를 불러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싱어송라이터 폴킴은 지난 22일 정규 2집 <마음, 둘>을 발표하고 활동에 들어갔으며, 현재 미국에 머무는 윤종신은 코로나19로 달라진 일상을 담은 일기 같은 노래 ‘고립’을 27일 발매한다.
지난 20일 새 음반 발표한 갓세븐. 제이와이피(JYP)엔터테인먼트 제공
미술관도 관객에게 손짓하고 있다. 서울 평창동 토탈미술관은 지난 24일 기획전 ‘원 웨이 라이프’(한 길의 삶)를 개막하면서 올해 첫 전시를 시작했다. 2월부터 석달간 문을 닫았던 서울 부암동 자하미술관도 오는 29일 리얼리즘 화가 박영균씨의 개인전 ‘꽃밭의 역사’(5월31일까지)를 시작하면서 문을 다시 열 예정이다.
코로나19 피해를 광범위하게 입은 문화계가 이처럼 서서히 기지개를 켜고 있지만, 단기간에 정상화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라이브로 진행하는 공연의 회복세는 더딜 수밖에 없다. 출연자들이 무대에 오르기 전 연습하고 준비하는 시간이 필요한데, 코로나19로 이런 과정이 중단됐기 때문이다. 한 공연 제작사 관계자는 “조금씩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분위기인 것은 맞지만, 준비 기간을 거쳐 무대에 서기까지 수개월이 걸리는 공연은 당장 원상복구될 수 없다”며 “코로나19 이후 정상화되기까지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경욱 기자, 문화팀 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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