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드 루시. 왼쪽부터 신예찬(바이올리니스트), 신광일(드러머·서브 보컬), 최상엽(보컬), 작사·작곡·프로듀싱을 맡은 조원상(베이시스트). 미스틱스토리 제공
눈을 감고 귀를 열면, 애니메이션 속 풍경이 펼쳐진다. 멀리서 다가오는 열차 소리, 천천히 퍼지는 오르골 소리. 그리고 이어지는 장엄하면서도 신비한 선율.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하울의 움직이는 성> 등 일본 스튜디오 지브리 애니메이션의 주제곡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그것과는 확연히 다른 가락을 듣고 있으면 열차는 음악 너머의 세상에 닿는 듯하다.
밴드 ‘루시’가 지난 8일 발표한 데뷔 싱글 <디어>(Dear)는 이런 ‘인트로’(Intro)로 시작해 타이틀곡 ‘개화’로 이어진다. “‘우리만의 특별한 노래 세계로 당신을 초대합니다’라는 의미를 ‘인트로’에 담았어요. 노래를 듣는 분들이 여행자라면 저희는 안내자인 셈이죠.” 지난 11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사옥에서 만난 루시 멤버들은 이렇게 입을 모았다.
루시는 4인조 밴드다. 지난해 종합편성채널 <제이티비시>(JTBC)에서 방송된 음악 예능 프로그램 <슈퍼밴드>를 통해 결성됐다. 멤버는 작사·작곡·프로듀싱을 맡은 조원상(베이시스트)을 비롯해 신예찬(바이올리니스트), 최상엽(보컬), 신광일(드러머·서브 보컬)이다. 이들은 슈퍼밴드 최종 경연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다.
타이틀곡인 ‘개화’는 밝고 경쾌한 봄노래다. 시작부터 청량한 바이올린 소리가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바람처럼 울려퍼진다. 하지만 마냥 싱그럽게 봄을 노래하는 것만은 아니다. 세상을 향한 따스한 위로도 건넨다. “넌 그저 그 자리에 그대로 아름다워/ (중략)/ 괜찮아 언젠가 파랗게 피어날 거야/ 나는 그런 널 기억할 거야.”
곡과 노랫말을 쓴 조원상은 “코로나19 사태로 노래에 담은 메시지가 확대됐다”고 했다. “석 달 전 곡을 완성했을 때만 하더라도 위로의 대상이 꿈을 이루지 못한 이들이었어요. 저희 또래 취업준비생이나 대학 입시생 등이었죠. 그런데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며 시름겨운 분들이 많아지면서 ‘언젠가 파랗게 피어날 거야’라는 메시지가 그분들에게도 위안으로 다가갈 수 있을 듯해요.”
루시가 기존 밴드와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 지점은 밴드 구성이다. 이 밴드에는 전자기타가 없다. 대신 바이올린이 그 자리를 메운다. 밴드에서 흔치 않은 구성인데, 이 점이 루시만의 독특한 빛깔을 빚어낸다. 신예찬은 “바이올린은 전자기타처럼 강력하면서도 훨씬 섬세하고 감정적인 표현을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밴드의 또 다른 특징은 ‘앰비언스 사운드’(주변 환경 소리)를 적절히 활용한다는 것이다. 이는 듣는 이로 하여금 특정 공간이나 시간을 떠올리게 한다. <슈퍼밴드>에서 선보인 것처럼 음악에 파도 소리와 새소리를 담아 공간을 무인도나 정글로 이동시키고(‘크라이 버드’), 유치원에서 아이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를 통해 유년 시절을 상기시키는(곡 ‘선잠’) 등의 방식이다. 이번 싱글의 ‘인트로’에 담긴 열차 소리도 이런 작업의 연장선이다. “곡을 쓸 때 어떤 공간과 그 속에서의 감정을 마치 한 편의 영상처럼 그리면서 작업해요. 이를 가장 직접적으로 전해줄 수 있는 방법이 뭘까 생각하다 앰비언스 사운드를 사용하게 됐어요.” 조원상의 설명이다.
구성원의 음악적 배경이 저마다 다른 점도 루시를 특별하게 만드는 요소다. 기상학자를 꿈꿨던 조원상은 아버지의 권유로 베이스기타를 치기 시작해 힙합, 이디엠(EDM·전자댄스음악) 등의 장르로 프로듀싱 범위를 넓혀왔다. 신예찬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바이올린을 연주한 클래식 전공자다. 메인 보컬 최상엽은 <당신이 잠든 사이에>(SBS), <첫사랑은 처음이라서>(넷플릭스) 등 다양한 드라마 오에스티(OST)에 참여했다. 독특한 음색을 가진 팀의 막내 신광일은 페루에서 6년쯤 유학생활을 하며 독학한 기타 실력을 바탕으로 드럼은 물론 베이스기타로까지 연주의 폭을 넓혀왔다.
아이돌 위주의 시장 구조 탓에 이름을 알리는 데 성공한 밴드는 극소수에 불과한 시대, 이들의 꿈은 무엇일까. “밴드를 하려면 여러 제약과 편견이 있어요. 드럼이나 기타 등 악기를 다뤄야 하고, 그 밴드만의 장르 음악을 해야 한다는 거죠. 저희는 이런 생각을 깨고 싶어요.”(최상엽) 앞으로도 이들은 특정 장르와 연주에 자신들을 묶어두지 않을 계획이다. 이들의 ‘개화’는 이제 막 시작됐다.
김경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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