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나는보리>의 한 장면. 영화사 진진 제공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엄마와 옷가게에 들어갔더니 일하는 사람 둘이서 수군거렸다. “저 ‘벙어리’들 또 왔네. 아, 귀찮아.” “야, 옷값 5천원 더 받아.” 소년은 다 듣고도 아무 말도 못 했다. 그저 자리를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가게를 나왔더니 엄마는 거스름돈 1천원이 더 왔다며 돌려주고 오라고 했다. 소년은 가게에 들어가 1천원을 돌려주고 조용히 나왔다. 김진유 감독은 아직도 그 일을 잊지 못한다.
김 감독의 첫 장편영화 <나는보리>(21일 개봉)에는 자전적 얘기가 녹아 있다. 11살 소녀 보리(김아송)는 네 식구 가운데 유일하게 듣고 말할 줄 아는 청인이다. 집에서는 농인인 엄마·아빠·동생과 수어로 얘기하고, 밖에 나오면 동네 어른들께 큰 소리로 “안녕하세요” 인사한다. 보리는 전화로 중국집에 짜장면을 시키고, 택시에 타면 앞자리에 앉아 길을 안내하는 등 말이 필요한 일을 도맡아 한다. 구김살 없고 씩씩한 보리지만, 간혹 얼굴에 그늘이 드리울 때가 있다. 엄마·아빠·동생이 수어로 얘기를 신나게 주고받을 때면 왠지 모를 소외감을 느끼곤 한다.
영화 <나는보리>의 한 장면. 영화사 진진 제공
김 감독은 강원도 강릉시 주문진에서 농인 부모 아래 태어났다. 엄마·아빠와는 수어로 소통하고, 한집에서 같이 산 고모네 식구와는 말로 소통했다. 유치원 소풍 때였다. 학부모들도 함께한 자리에서 그는 어린이 사회자를 맡게 됐다. “앞에 나가 사회를 보는데, 엄마가 보였어요. 말로 진행하면서 속으로 ‘엄마가 알아들으시려면 수어로 해야 하는데…. 말로 하면 엄마가 못 알아들으실 텐데…’ 생각했어요. 심경이 복잡했죠. 그때 우리 집이 다르다는 걸 처음 느꼈던 것 같아요.” 최근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난 김 감독이 말했다.
영화 <나는보리>의 한 장면. 영화사 진진 제공
고등학생 시절, 그는 저녁마다 작은 상영 공간이 있던 ‘강릉씨네마떼끄’에 가서 영화를 보고, 정동진독립영화제에서 자원활동가로도 일하며 영화감독을 꿈꿨다. 학교를 졸업하고선 단편영화 <높이뛰기>를 만들어 2014년 영화제에 출품했다. 어릴 적 옷가게에서 겪은 일을 담은 것이었다. 이 영화를 계기로 한국농아인협회가 주최한 ‘수어로 공존하는 사회’ 행사에 연사로 초청됐다. 거기서 농인 수어통역사 현영옥씨가 “어렸을 때 엄마·아빠와 똑같아지고 싶은 마음에 소리를 잃고 싶었다. 결국 농인이 된 지금, 행복하다”고 말하는 걸 듣고는 자신도 어릴 때 같은 생각을 했었다는 걸 떠올렸다. “처음엔 현영옥씨 얘기를 영화로 만들어보자 했어요. 그런데 시나리오를 쓸수록 제 얘기가 많이 들어가는 거예요. 결국 제 얘기를 뼈대로 한 영화가 됐죠.”
영화 <나는보리> 김진유 감독이 지난 13일 오후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보리는 엄마·아빠·동생과 똑같아지고자 소리를 잃으려 한다. 볼륨을 최대로 키워 헤비메탈 음악을 듣다가 급기야는 극단적 행동을 한 뒤엔 소리를 잃은 척하기에 이른다. 보리는 엄마와 옷가게에 갔다가 김 감독이 어릴 적 겪었던 상황에 똑같이 처한다. 보리는 결정적 순간에 다르게 행동한다. 더 받은 거스름돈을 돌려주러 혼자 가게에 들어가서는 “엄마가 이거 돌려주래요” 하고 당당히 소리친다. 옷가게 사람들은 깜짝 놀라며 당황한다. “‘그때 이렇게 말했어야 했는데…’ 하는 분하고 답답했던 마음을 이번에 보리를 통해 풀었죠.” 못 듣는 척, 말 못하는 척하면서 보리는 가족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는 한편, 청인과 농인 사이에서 느끼던 정체성의 혼란을 극복해나간다.
영화는 2018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한국영화감독조합 감독상과 2019년 독일 슐링겔국제영화제 관객상 등을 받았다. 김 감독은 “영화를 그만둘까 생각했을 정도로 지치고 힘들었을 당시 선배 감독들이 등을 토닥여주는 의미로 다가온 부산영화제 상이 큰 힘이 됐다”며 “독일 영화제에서 어린이 관객들이 투표로 뽑은 관객상을 받았을 때는 ‘외국 아이들도 같은 걸 느끼는구나’ 하는 생각에 보람도 있었다”고 말했다.
영화 <나는보리> 김진유 감독이 지난 13일 오후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그동안 장애인을 불쌍한 존재로 그리거나 눈물샘을 자극하는 소재로 이용하는 영화가 많았는데, 이 영화를 통해 농인 가족도 다른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산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무엇보다 영화 속 아빠의 이 대사를 꼭 전하고 싶었어요.” 영화에서 아빠는 보리에게 수어로 이렇게 말한다. “들리든 안 들리든 우린 똑같아.” 김 감독은 들리든 안 들리든 똑같이 영화를 볼 수 있도록 영화 전체에 한글 자막을 넣었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