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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수행인 듯, 예술인 듯…노승의 ‘옻칠민화 정진’

등록 2020-06-07 15:20수정 2020-06-08 02:34

[통도사 방장 성파스님 특별전]
옻칠과 민화, 현대미술로 융합
불화에서 암각화 대작까지 100여점
여든 넘기고도 꺼지지 않는 창작열

“사각의 연못은 자연의 캔버스요,
시간과 바람 흔적을 느껴보시라”
깜짝 뗏목 퍼포먼스에 관객 탄성
지난달 29일 경남 양산 통도사 서운암 작업실에서 성파 방장스님이 자신의 작업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스님 뒤쪽에 그가 작업해온 건칠 기둥 설치작품들이 보인다. 이 건칠 기둥들을 엮어 현대적인 스타일의 집을 지어볼 계획이라고 스님은 말했다.
지난달 29일 경남 양산 통도사 서운암 작업실에서 성파 방장스님이 자신의 작업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스님 뒤쪽에 그가 작업해온 건칠 기둥 설치작품들이 보인다. 이 건칠 기둥들을 엮어 현대적인 스타일의 집을 지어볼 계획이라고 스님은 말했다.

“이제 배 띄워야지….”

초승달 비치는 연못가에 옻칠 된 뗏목이 놓여 있었다. 팔순 넘긴 노승이 올라타더니 가만히 큰 노를 잡고 젓자 뗏목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연못가에서 그와 어울려 도란도란 정담을 나누던 지인들은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당황한 듯 일부는 뗏목에 급히 올라타고 일부는 연못가에서 노를 젓는 노승을 바라보았다. 스님은 일행에게 말했다. “사각진 이 연못은 자연의 캔버스예요. 그리는 그림에는 담지 못하는 시간과 움직임을 보여줄 수 있지요. 물살 위로 퍼져나가는 바람의 흔적을 느껴보기 바랍니다.”

지난달 29일 저녁 경남 양산 통도사의 암자인 서운암 기슭에서는 예술인들의 탄성이 터졌다. 이 절의 최고 어른이자 옻칠 민화의 대가로 소문난 성파(82) 방장스님은 초대한 예술인들 앞에서 뗏목 퍼포먼스를 펼쳤다. 서운암 작업실 아래 동산에 400평 넘는 규모로 서너 달 전 파놓은 인공연못이 무대가 됐다. 스님은 사각진 옻칠 뗏목을 띄워놓고 천천히 둘레를 돌았다. 초승달과 산사의 불빛이 수면에 너울거리는 야경이 펼쳐지는 가운데 연못가와 뗏목에 둘러앉은 예술계 인사들은 이날 절 성보박물관에서 열린 스님의 옻칠 민화 특별전(29일까지)의 작품과 연못에 오는 가을 펼쳐질 수중 전시회를 놓고 이야기꽃을 피워올렸다.

울산 반구대의 선사시대 암각화를 옻칠 판 위에 자개 이미지로 재현한 대작 앞에서 스님이 설명을 하고 있다. 3년째 작업 중인 이 대작은 올해 가을 완성해 전시할 예정이다.
울산 반구대의 선사시대 암각화를 옻칠 판 위에 자개 이미지로 재현한 대작 앞에서 스님이 설명을 하고 있다. 3년째 작업 중인 이 대작은 올해 가을 완성해 전시할 예정이다.

뗏목을 탄 뒤 아래쪽 작업장으로 내려갔다. 울산 반구대 선사암각화와 천전리 암각화를 3년간 옻칠 판에 재현해온 대작들과 길이 24m짜리 초대형 괘불화 제작 현장을 잇따라 볼 수 있었다. 세로 4.3m, 가로 6.7m의 옻칠 판에 고래와 사냥꾼, 뭍·바다 동물들이 어울린 반구대 암각화의 장관이 영롱한 자개 이미지로 수놓아져 빛을 뿜었다.

“암각화 대작들을 연못 아래 물속에 담가서 올가을 전시할 계획입니다. 옻칠그림은 방수성이 뛰어나 물이 들어가도 아무렇지 않아요. 물이 액자가 되고 화면이 되고 그 위에 낙엽이 지고 개구리가 뛰어노는 화폭이 되는 거죠. 서운암 위쪽 이팝나무 숲에도 나무들 사이에 수조를 작업한 옻칠그림들을 물에 담가 전시하려 합니다. 세계 최초의 야외 수중전시를 하는 셈입니다.”

통도사 옻칠 민화 특별전에 나온 민화의 개 그림. 안료를 섞은 옻칠 물감으로 채색해 중후하면서도 질감이 뚜렷한 이미지를 구현해냈다.
통도사 옻칠 민화 특별전에 나온 민화의 개 그림. 안료를 섞은 옻칠 물감으로 채색해 중후하면서도 질감이 뚜렷한 이미지를 구현해냈다.

1985년까지 통도사 주지를 지내며 수행에 충실하다 홀연 예술로 방향을 튼 스님의 원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90년대 이후 서예, 도자기, 옻칠 민화, 건칠 조형물 등을 중국 유학과 독학으로 섭렵하면서 높은 완성도의 작품들을 내놓고 있다. 팔만대장경 각 한벌을 도자판 두벌로 만든 16만 도자대장경을 21년간 작업해 2012년 장경각에 봉안한 일은 교단과 문화재계를 놀라게 한 대사건이었다. 2014년에는 옻칠 물감으로 그린 민화를 처음 선보여 미술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29일 개막한 옻칠 민화 전시는 20년간 작업했던 주요 작품 100여점을 한자리에 모은 큰 작품마당이다. 그는 1983년 옻 작품으로 처음 전시한 이래 국내외에서 옻과 민화, 불교미술을 접목한 현대미술 개념의 전시를 10여 차례 열어왔다. 이번 전시에서도 조선시대 금강전도 그림을 10m 이상의 대화면으로 두배 이상 확대한 대작 <금강산도>를 비롯해 나무 위의 새와 개를 담은 동물화, 한반도 비극을 딛고 웅비하는 호랑이의 자태를 담은 <수기맹호도>, 사방에 병풍이 펼쳐진 얼개의 <일월오봉도> 등이 출품돼 동물 표정, 산수 풍경 세부를 섬세하게 묘사한 고도의 필력과 옻칠 특유의 중후한 질감을 내보였다.

전시장에 나온 신수도.
전시장에 나온 신수도.

방장은 사찰에서 가장 높은 위계의 수행승 자리에 해당하는데 그가 현대미술가를 방불케 하는 행보를 보이는 까닭은 뭘까. 서운암에서 차를 마시며 스님은 말했다.

“합천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절에서 만든 옻 냄새에 익숙했어요. 절은 화승들의 채색 불화를 통해 문인화, 산수화 등에 밀려 끊어진 민간 채색화의 맥을 잇고 자유로운 민화적 도상도 빚어냈어요. 19세기엔 민화의 이미지를 전국으로 확산한 본산이었고요. 이런 역사가 여전히 외면되고 묻혀 있어요. 1985년 통도사 주지를 그만둔 뒤부터 수행승 행정승의 두 영역을 벗어나기로 마음먹었지요. 불교와 전통 미술의 인연을 현대 작품 창작을 통해 일깨우고 회복시키는 데 몰두해왔습니다.”

90년대 초 서운암을 화실 삼으면서 인연을 맺은 재불화가 고 이성자 화백의 권유는 그림 그리는 길로 내닫게 한 실마리가 됐다. 우리 전통 산수화와 옻칠그림을 제대로 배워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중국의 일류 대가들 작업실을 10여년간 왕래하고 머물면서 일일이 사사해 오늘날 옻칠 민화와 건칠 설치작업, 암각화 재현 작업을 할 수 있는 바탕을 만들었다고 스님은 떠올렸다.

궁중회화인 일월오봉도 병풍도 옻칠 회화 기법으로 새롭게 재현돼 전시장에 나왔다. 병풍을 사방으로 펼친 개성적인 전시방식이 눈에 띈다.
궁중회화인 일월오봉도 병풍도 옻칠 회화 기법으로 새롭게 재현돼 전시장에 나왔다. 병풍을 사방으로 펼친 개성적인 전시방식이 눈에 띈다.

“승려의 최고 자리까지 누린 사람입니다. 민화가 한국 미술의 일부로서 ‘한국화’라는 떳떳한 자기 이름을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하는 데 목표를 세우고 정진하려고 합니다. 사업도 아니고 오직 제 마음만으로 하고 싶으면 다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좋은 여건을 가졌는데 미술을 위해 무언가 하지 않는다면 너무 아깝지 않습니까?”

양산/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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