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고양 서삼릉에 있는 집단 태실 영역의 모습.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조선시대 국왕·왕자·왕녀 등의 태실 54기를 일제가 1930년대 한데 모아 만들었다.
국가 사적인 경기도 고양 서삼릉은 나들이 명소로 널리 알려진 조선왕릉 중 하나다. 이름 뜻 그대로 서울의 서쪽에 있는 세 개의 왕릉, 곧 중종비 장경왕후의 희릉과 인종과 인성왕후의 효릉, 철종과 철인왕후의 예릉을 일컫는다.
일반인들은 잘 모르지만, 서삼릉 안에는 세 왕릉 말고도 공동묘지 같은 공간이 자리하고 있다. 국왕·왕자·왕녀 등의 태실 54기와 왕자·왕녀·후궁 등의 분묘 45기가 모인 영역이다. 태실이란 왕실에서 태어난 아기씨의 태(胎:탯줄)를 묻은 곳이다. 기운 좋은 땅을 골라 태를 모시는 것을 안태(安胎)라고 하는데, 안태는 아기씨의 건강뿐 아니라 왕실과 나라의 번영을 기원하는 왕실 특유의 문화로 꼽혀왔다.
그렇다면 왜 아기씨가 태어난 흔적을 담은 태실과 왕실 망자의 분묘들을 왕릉 구석에 따로 집단 무덤처럼 모았을까. 원래 조선왕실에서 태실과 분묘는 전국 각지의 길지(吉地)를 신중하게 골라 만들어졌는데 말이다. 여기엔 조선왕조의 멸망과 망국에 서린 구슬픈 사연이 있다.
경술국치 뒤 일제는 옛 왕실의 관리가 부실해져 각지의 태실과 분묘가 훼손될 우려가 있으니 온전히 보전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1929~40년 서삼릉에 별도의 태실과 분묘 영역을 조성하고 무단으로 옮기게 하는 폭거를 저질렀다. 조선왕실에서 태실과 분묘를 조성할 때 핵심적인 요소로 중시했던 ‘길지’란 장소성과 역사적 맥락은 무시되었다. 강제 이전 뒤 원래 태실을 두었던 자리인 초안지와 초장지에 놓였던 석물 등 문화유산은 흩어져 방치되거나 민묘의 석물로 쓰이는 신세가 됐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가 조선왕실 태실과 왕실 분묘의 근대기 수난사와 관련해 의미심장한 조사결과를 11일 내놓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과 협업해 일제강점기 서삼릉에 강제 이전된 태실과 분묘가 원래 있었던 자리, 즉 전국에 흩어진 초안지 51군데(일본 2곳과 북한 1곳 제외)와 서울·경기 일대의 초장지 44곳(소재 미상 1곳 제외 원래 분묘가 있던 자리)의 실태를 파악해본 것이다.
조사 내용을 보면, 초안지와 초장지의 관리는 대부분 방치 수준을 넘지 못했다. 초안지는 조사 대상 51곳 중 경북 성주의 세조 태실지와 충남 서산의 명종 태실지, 경남 사천의 세종 태실지 등 16곳만 국가사적, 지방문화재로 지정됐고 36곳은 방치 상태로 분류됐다. 4곳은 태실을 내부에 봉안한 봉분 모양의 태봉이 아예 사라졌다. 강원도 영월에 있다가 발전소 건립으로 태봉이 허물어진 정조의 태실, 충남 홍성에 있었으나 옹기 공장이 들어서면서 태봉이 사라진 순종의 태실 등이 그런 경우다. 경남 사천시 곤명면에 있는 예종의 1남 인성대군 태실은 경남 기념물로 지정됐으나, 단종의 태실로 오인돼 지금도 기념물 내역에 단종 태실지로 소개되며, 초안지에 남은 석물 중 일부는 부근 민간 무덤의 석물로 쓰이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후대 민간인 무덤이 들어선 초안지도 12곳에 달해 서삼릉에 이전된 태실 중 최소 10여곳은 원래 초안지로 돌아갈 길이 사실상 막힌 셈이 됐다. 일부 초안지에서 석물 등이 주변에 보호 대책 없이 흩어져 있는 경우도 상당수 확인됐다.
서삼릉 한구석에 공동묘지처럼 조성된 조선왕실 빈과 귀인들의 집단 분묘.
왕족 분묘 초장지는 상태가 더욱 열악했다. 조사 대상 44곳 중 터가 남은 곳은 경기 서오릉 안에 있는 예종의 장남 인성대군묘 초장지 한 곳뿐이었다. 나머지는 터가 사라져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석물만 남은 경우도 네 군데에 불과하다. 인성대군묘의 것을 포함해 경기 고양에 있던 세종의 장녀 정소 공주 초장묘의 추정 석물, 경기도 포천시 선단동에 있었다는 철종 후궁 귀인 평양 조씨 묘의 석물, 서울 하월곡동 초장지에서 수습돼 창덕궁에 전해지는 고종의 첫아들 완친왕묘의 석물이 그것이다.
중요한 성과도 있었다.
일제강점기 태실과 왕실 분묘 이장 과정과 관련해 장서각에 소장한 문헌인 <태봉>과 <능원묘천봉안> 등을 분석해 구체적인 정황을 알 수 있었고,
기존에 잘못 알려졌거나 불확실하던 일부 초장지 또는 초안지의 위치도 새롭게 밝혀냈다. 예컨대, 헌종의 총애를 받았던 후궁 경빈 김씨 묘의 원래 자리는 남양주 휘경원 근처로 추정해왔으나, 조사를 통해 고양시 숭인면 휘경리(서울 동대문구 휘경동)로 드러나 이번에 바로잡게 됐다. 또, 현장 조사로 중종의 아들이자 선조의 친아버지인 덕흥대원군의 초안지로 추정되는 여러 곳 중 한 곳에서 당시 태실에 썼던 것으로 보이는 잔존 석물을 확인하기도 했다.
조사를 맡았던 본부의 이홍주 학예사는 “서삼릉으로 태실과 분묘가 이안된 과정이 일제의 강압에 따른 것이었던 만큼 문화재청과 지자체가 초안지, 초장지에 관한 정보를 공유하면서 현장 상황에 맞게 보전관리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며 “서삼릉으로 이전되지 않은 각지의 다른 태실들도 조사해 조선시대 전체 태실의 전모를 파악하는 것도 과제”라고 말했다.
서삼릉 내 집단 태실과 묘역은 아직 열리지 않았다. 문화재청은
탐방로와 관람편의시설 등 정비를 거쳐 9월께부터 해설사를 동반한 제한 관람 형식으로 집단 태실과 묘역을 개방할 계획이다.
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문화재청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