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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우리는 좀 더 서로를 ‘버려도’ 되지 않을까요

등록 2020-06-12 20:16수정 2020-06-13 02:32

[토요판] 김선영의 드담드담
영혼 없는 관계 ‘손절’ 그린
일본 드라마 <나기의 휴식>
드라마 &lt;나기의 휴식&gt; 공식 트위터 계정 갈무리
드라마 <나기의 휴식> 공식 트위터 계정 갈무리

28살의 직장인 오시마 나기(구로키 하루)는 회사에서 불평 한마디 하지 않는 성실한 인물이다. 동료들은 궂은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나기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하지만 나기의 상냥함은 타고난 본성이 아니라 처절한 노력의 결과였다. 사실 극도로 주변의 눈치를 살피는 나기는 하고 싶은 말을 꾹 참고 사느라 하루하루가 버겁다. 그녀의 힘겨운 일상을 버티게 해주는 유일한 힘은 비밀리에 사내 연애 중인 남자친구 가몬 신지(다카하시 잇세이)의 존재다. 어느 날 동료의 부탁으로 연장근무를 하던 중 뜻밖의 진실을 접하게 된 나기는 과호흡으로 쓰러진다. 입원기간 동안 나기의 안부를 물어보는 동료는 한 사람도 없었다. 충격을 받은 나기는 퇴원과 동시에 모든 형식적 인간관계를 끊는다. 지금 나기에게는 새 출발이 절실하다.

지난해 일본 <티비에스>(TBS)에서 방송한 <나기의 휴식>은 2018년 ‘일본 만화 대상’ 수상작을 원작으로 한다. 타인에게 맞춰 사는 데 급급했던 한 여성을 통해 우리 시대의 ‘리셋 판타지’를 자극하는 작품이다. 하지만 기존의 타임슬립 판타지처럼 과거의 시간을 한번에 되돌리는 거창한 방식이 아니라 일상에서부터 조금씩 자신의 감각을 되찾아가는 과정으로 그린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나기는 전 재산 1000만원과 이불 하나만을 달랑 들고 도쿄의 변두리 낡은 아파트에 새 방을 구한다. 그동안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느라 필요했던, 장식에 가까운 짐을 다 버리고 난 새집은 거의 텅 비어 있다. 이 빈방은 앞으로 나기가 자아를 회복해가는 과정과 궤를 나란히 하며 하나씩 자신을 위한 물건으로 채워질 것이다.

<나기의 휴식>이 흥미로운 것은 그 작은 일상의 변화가 그 어떤 극적인 전환보다 더 흥미진진하게 그려진다는 데 있다. 가령 나기가 집 앞 도랑에 버려진 선풍기를 주워 올까 망설이는 순간이나 시장에서 잘못 계산된 영수증을 확인하고 머뭇거리는 순간처럼 지극히 사소해 보이는 일상의 장면들을 클로즈업함으로써, 그것이 나기에게는 얼마나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갈등의 순간인지 잘 보여준다. 한참을 고민하던 나기가 마침내 용기를 내 자신의 의지를 표현하는 모습에서는 카타르시스마저 느껴진다.

그리고 이러한 감동은 남의 눈치를 보는 나기의 행위가 단순히 개인의 유별난 특성 때문이 아니라, 이 사회가 젊은 여성에게 요구하는 자세와 무관하지 않다는 데서 온다. 신지처럼 ‘듬직하고 능력 있는 남자’를 만나서 결혼을 하고 좋은 아내와 엄마가 되는 것이 여성의 ‘정상적인 통과의례’처럼 인식되는 사회에서 비혼의 젊은 여성이 다른 삶의 가능성을 상상한다는 것은 아직도 어렵다. 그 작은 ‘자기만의 방’을 출발점으로 한 걸음씩 성장해나갈 나기의 이야기에 응원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티브이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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