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고 긍정적인 ‘차미호’는 실제 제 성격과 닮았어요.” 그래서일까? 함연지는 뮤지컬 <차미>에서 취준생 차미호를 잘 표현해내며 배우로서 존재감을 뚜렷이 하고 있다. 함연지를 최근 서울 중구의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오뚜기 장녀’ ‘오뚜기 3세’.
함연지란 이름 앞에는 늘 이런 수식어가 달린다. 뮤지컬 배우라는 직업보다 배경이 더 큰 주목을 받는 것이다. 재벌가 자녀가 연예계에 몸담는 건 드라마에서나 보던 ‘의외의’ 일이니까. 최근 서울 종로의 한 커피숍에서 만난 함연지의 반응은 의외였다. “배우로만 봐달라”며 속상해하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오뚜기’란 이름 때문에 관심을 가져주시는 것도 감사해요. 누를 끼치지 않게 최선을 다하려 노력합니다.”
그동안 연기가 배경을 뛰어넘지 못했다는 뜻도 된다. 그는 2015년 대극장 뮤지컬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 데뷔해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2015), <노트르담 드 파리>(2018) 같은 대극장 뮤지컬과 대극장 연극 <아마데우스>(2018)에 출연했다. <무한동력>(2015), <지구를 지켜라>(2016)로 대학로 소극장 무대에도 올랐지만 대표작을 만들지는 못했다.
그런 그가 요즘 배우로서 존재감을 각인시키고 있다. 7월5일까지 서울 충무아트센터에서 공연하는 뮤지컬 <차미>에서다. 소셜미디어에 빠져 사는 요즘 시대상을 반영한 이 작품에서 그는 취업준비생 차미호를 연기한다. 함연지가 취준생이라고? 현실이 드라마를 방해할 것 같은데, 막이 오르면 갸우뚱하던 고개가 제자리를 찾는다. 편의점에서 생계형 아르바이트를 하며 좀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차미호를 찰떡처럼 연기한다. “원래 성격이 평범해요. 미호가 제 실제 성격에 가장 가까워요. 소심하고 부끄러움도 많고. 남편도 대본을 보더니 그냥 딱 너라고 하더라고요. 헤헤헤.”
뮤지컬 <차미>에 출연한 배우 함연지. PAGE1 제공
하지만 그가 취준생의 간절함을 알까? “오디션을 보러 다니던 시절을 떠올리며 이해하려고 노력했다”고 말한다. “연기과를 졸업하고 1년6개월 동안 수많은 오디션에 도전했고 또 실패했죠. 난 왜 떨어질까, 내 길이 아닌가 고민도 많았고요. 불안함, 실망감에 빠졌다 다시 용기를 내는 과정을 반복했어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주연으로 데뷔했지만 바다와 서현의 ‘커버’(다른 배우를 대신해 무대에 서는 역할)였다. “딱 4번 무대에 섰고, 전용 의상도 없었어요. 하하하. 그래도 너무 행복했어요.”
물론 생계형 취준생과 그의 좌절을 단순 비교 할 수는 없다. 그는 경험 부족을 공부와 상상으로 채워간다. “책·유튜브 등에서 자료를 읽거나 벽에 붙여놓고 상상하면 진짜 그 시대를 사는 것 같아요.(웃음) 그래서 역사적인 실존 인물을 연기하는 걸 좋아해요. 차미는 극 중에서 왠지 ○○대 사회학과를 나왔을 것 같아 그 대학 앞 편의점에 가보기도 했어요.(웃음) 엄마는 일찍 돌아가셨고 아빠하고는 안 친할 것 같고, 동생은 아플 것 같고…. 인물의 아픔이나 목표를 몸 안에 넣어요. 그러고 나면 훨씬 몰입이 잘돼요.”
뮤지컬 <차미>에 출연한 배우 함연지. PAGE1 제공
그도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근성 있는” 차미호처럼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만들어왔다. 6살 무렵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미녀와 야수>를 본 뒤 뮤지컬에 빠졌고, 중학교 3학년 때 <인어공주>의 넘버(노래) ‘파트 오브 유어 월드’를 부르는 영상을 인터넷에 올려 화제가 돼 본격적으로 뮤지컬 배우를 꿈꿨다. 고등학교 때 뮤지컬 동아리를 만들어 병원 봉사활동도 다녔다. “뮤지컬은 드라마, 노래, 춤이 어우러진 복합 예술이라는 점이 좋아요. 정극 연기와 다른 환상적인 느낌을 줄 수도 있고. 감성에 젖게 하는 매력이 있어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출연하며 그의 배경이 서서히 알려졌고 선입견을 갖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며 혹시 모를 오해를 잠재웠다.
뮤지컬 <차미>에 출연한 배우 함연지. PAGE1 제공
요즘엔 유튜브 채널을 만들어 자신의 일상도 공개한다. 오뚜기 제품으로 요리도 만들고 가끔 아빠 함영준 회장도 출연한다. 연예인이 티브이에 나와 집을 공개하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던 이들도 함연지의 유튜브를 보며 함께 웃는다. 드라마로 보던 ‘재벌의 생활’과 너무도 다른 모습 때문이다. 키가 작아 무시당한 경험을 얘기하고, 다이어트 실패담을 고백한다. 매사 가성비를 따지고, 세탁소 옷걸이가 걸려 있는 모습엔 웃음이 터질 수밖에 없다.
고생 모르는 듯한 해맑은 모습이 이미지 변신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는 걱정은 하지 않을까. 그는 “내 성격을 뛰어넘어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어야 하는 게 배우인 것 같다”며 “거친 역할도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억지로 꾸미기보단 <차미>의 메시지처럼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며 살다 보면 어느 순간 더 성장해 있지 않을까요?” 표정을 감출 수 없는 햇살 쨍쨍한 한낮, 함연지의 눈동자가 초롱초롱하다.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