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문화일반

“여성 감독 범주화 필요 없는 날 왔으면”

등록 2020-09-07 04:59수정 2020-09-09 11:42

[①‘69세’로 박남옥상 받는 임선애 감독]

요즘 한국 영화계의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여성 감독들의 약진이다. 국내외 영화제 59관왕을 달성한 <벌새> 김보라 감독을 비롯해 <우리들> 윤가은 감독, <메기> 이옥섭 감독 등이 대표적이다. 이 명단에 올려야 마땅한 여성 감독 둘이 한꺼번에 등장했다. 최근 장편 데뷔작으로 호평받고 있는 <69세> 임선애 감독과 <남매의 여름밤> 윤단비 감독을 만나봤다.

영화 <69세>를 연출한 임선애 감독. 엣나인필름 제공
영화 <69세>를 연출한 임선애 감독. 엣나인필름 제공
2016년 여름,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골목에서 낯선 남자가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난 나이도 있고 옷차림도 후줄근하니 괜찮겠지?’ 아니었다. 그 짧은 길을 지나는데도 심장이 쿵쾅거렸다. 과거에 겪은 성폭력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금도 이런데, 60대가 되어도 마찬가지겠구나.’

2013년 읽었던 칼럼을 떠올렸다. 노인 여성을 무성적 존재로 보는 사회적 편견 때문에 가해자가 안심하고 성범죄 대상으로 삼는다는 내용이었다. “그때 충격을 받았으면서도 나와 먼 얘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요. 여자라면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보편적인 얘기라는 사실을 깨달았죠.” 본격적으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영화가 지난달 20일 개봉한 <69세>다. 69살 여성 효정(예수정)이 병원에서 29살 남성 간호조무사에게 성폭행을 당한 뒤 이에 맞서는 이야기를 담은, 임선애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영화 <69세> 스틸컷. 엣나인필름 제공
영화 <69세> 스틸컷. 엣나인필름 제공
임 감독은 홍익대 미대에 다니던 시절 영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2001년 휴학하고 이정재·장진영 주연 영화 <오버 더 레인보우> 연출부 막내로 들어갔다가 그림 좀 그린다는 이유로 스토리보드 작가를 하게 됐다. 이후 스토리보드 작가 일이 계속 들어와 20년간 50편 넘는 작품에 참여했다. 영화 연출의 꿈도 포기할 수 없어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전문사 과정에 들어가 극영화 시나리오를 전공하기도 했다.

“결혼과 출산에 따른 경력 단절로 ‘꿈을 접어야 하나?’ 불안해한 적도 있었어요. 아이 키우느라 스토리보드 작가 일도 쉬던 중 문득 ‘지금은 내가 멈춰 있는 시간이 아니다. 온전히 내 이야기를 쓰는 시간으로 삼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시나리오 작업을 더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그는 <69세>를 통해 “노인 여성도 누군가의 어머니, 할머니이기 전에 다층적 인간임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효정이 간병인으로 일하면서도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늘 옷을 차려입는 이유다. 노인들이 “우리를 배려해주세요” 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존엄을 찾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단다.

영화 <69세>를 연출한 임선애 감독. 엣나인필름 제공
영화 <69세>를 연출한 임선애 감독. 엣나인필름 제공
임 감독은 이 영화로 오는 10일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개막식에서 ‘박남옥상’을 받는다. 한국 최초의 여성 감독 박남옥을 기리는 상이다. “<69세> 촬영 들어갈 때 촬영감독이 사진 한장을 보여줬어요. 박남옥 감독이 촬영 현장에서 아이를 업고 가마솥을 저으며 스태프 먹일 밥을 하는 장면이었어요. 그렇게 힘들게 영화를 하셨던 거예요. 나도 포기하지 말고 오래오래 해야겠다고 결심하게 해준 분 이름의 상을 받는다니 더 뜻깊은 것 같아요.”

최근 여성 영화인들의 활약이 돋보인다는 말에 그는 반은 동의하고 반은 동의하지 않는다 했다. “여성 영화인들이 갑자기 확 나온 게 아니라 늘 이야기를 쓰고 준비하고 있었다”며 “같은 사건도 기존과 다른 시선으로 접근하는 신선한 영화들이 여성 감독들에게서 많이 나와서 두드러져 보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여성 감독이 늘었다고는 해도 여전히 기울어진 운동장이에요. ‘여성 감독’으로 범주화하는 것도 과도기적인 현상이라 생각해요. 여성 감독이 더 많아져 더는 여성·남성 구분할 필요가 없어지고, <윤희에게>의 임대형 감독처럼 여성 서사를 잘 만드는 남성 감독도 더 많아지는 날이 언젠가 오지 않을까요?”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