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문화일반

프랑스 문화원 ‘시네 키즈’ 욕망 채우던 놀이터

등록 2006-01-18 17:38수정 2006-01-19 13:46


올 4월이면 한국에 자리잡은 지 물경 38년째가 되는 프랑스문화원. 1968년 생긴 이래 문화원은 모든 예술인에게 에스프리를 불어 넣어준 곳이다. 특히 영화인들에겐 둘도 없는 학습 전당이었고, 쉴 수 있는 쉼터, 숨 쉴 수 있는 숨터였다.

지난 6일, 문화원이 새단장 개원식을 열었다. 다시금 일신을 꾀하기 위해서다. 80년대 중반 비디오 시대가 도래하며, 20여년 풀죽어 있던 것에 대한 아쉬움이 베인다. 외국문화원이 한 나라의 문화아카데미로 우뚝 선 것은 지극히 한국적이고 시대적인 현상이었기에 옛날의 영광은 재현하기 어렵겠지만 문화원은 지난 명성을 되찾고, 프랑스 영화를 더 많은 관객에게 소개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실없는 상상으로 시작한다. 만일 그때 ‘프랑스문화원’이 없었다면? 한국 영화는 10년 아니 20년을 퇴보해 있을지 모른다. 제 인생의 8할이든 1할이든 그 곳에 빚 진 이들이 많아서다. 영화감독 정지영, 장길수, 배창호, 박광수, 김홍준, 강제규, 곽재용, 박찬욱, 김지운, 영화평론가 정성일, 양윤모, 부산영화제 프로그래머 전양준, 배우 안성기 등등…. 다 욀라 치면 숨이 턱에 차 닿는다.

이젠 명사가 된 이들이 도란도란 “참두부 하나 시켜놓고 깡(강)소주를 마시던 시절”(박건섭 교수)이었다. ‘영춘관’에서 자장 하나로 주린 배를 어르던 때였다. 연고 없는 종로구 사간동 어디께의 실미집과 중국 음식점. 1970~80년대, 프랑스 문화원이 없었으면 가지 않았을 곳. 그때 그 곳으로 가본다.


편식으로 죽을 노릇


1960년대 중후반, 한국 영화는 절정이었다. 66~70년 한 해 극장 관객수가 연방 1억5000만(역대 최고)명을 넘어섰다. 69년, 흑백 영화도 아주 사라진다. 국내 제작된 영화만도 연간 200편 꼴. 그런데 이상했다. 영화판 상다리가 휘어질 듯 푸짐한데 젊은 식객들, 허구한 날 목 마르고 허기졌다는 것이다.

죄다 문예 아니면 반공 영화인 탓이다. 그 즈음 외국 영화는 한해 20편 정도로 제한됐고 대개 또 미국 상업 영화들이었다. 나라님들은 입맛대로 필름을 잘랐으니, 먹어도 편식 아님 울화통으로 죽을 노릇인 때다. 전양준씨는 그 시절 자신들을 “미학적, 성적, 사회적으로 억압받은 세대”라고 일렀다.

68년 문 연뒤 매주1편씩 영화 상영
당시 억압받던 세대들 자유·해방 맛봐

문화 자유특구 1호

1968년 4월, 프랑스문화원(종로 적선동)이 문을 연다. 음울한 시대, 영사된 빛이든 자유의 빛이든 좇다 보니 그 곳이다. 영화가 온전하게 은막까지 닿는 거의 유일한 장소. 20원 가량 내고 수요일마다 한 차례 감질나게 맛보는 자유였을 게다. 그해 봄, 문화원에 발을 들인 정지영 감독은 미개봉 영화 <히로시마 내 사랑>(알랑 레네 감독)을 빌려와 학교 축제 때 틀었다. 일본 개봉판 제목인 <24시간 정사>로 내걸었다. 시대를 조롱으로 웃음으로 능멸한 셈이다. 학생들은 환호를 질렀다. 문화원 1세대로 불리는 정 감독은 “당시 우리한텐 그 곳을 찾을 수밖에 없는 시대적 답답함이 있었다”고 회고한다. 자유와 해방의 세계를 아련히 체험할 수 있던 문화 특구였던 것이다.


돌리고 돌리고

사간동으로 옮긴 71년부터 프랑스 문화원은 전성기에 이른다. 지하 영상실 ‘살 드 르누아르’(르누아르의 방)는 ‘허가 난 포르노 극장’이란 입소문까지 나며 유명세를 치렀다. “프랑스 문화광, 영화 전공자, 불어 꽤나 할 것 같은 여대생과 여대생을 따라다니던 남학생”(소설가 성석제)까지 넘쳐났으니, 110석짜리 자그만 공간을 하루 최대 6회까지 돌려가며 전력 가동한대도 발 돌린 이들이 많았다. 73년부터 문화원 근속 중인 최재원씨는 “70년대 중반, 인사동 로터리까지 줄을 섰는데 시위하는 줄 알고 경찰이 출동한 적도 있었다”며 웃는다. 본국에서 매달 5~10편씩 새로 들어온 영화에 고다르, 트뤼포, 샤브롤, 브레송이 있었다. 그러면 중독이다. 중학생 정성일도, 고등학생 김홍준도, 대학생 강제규도, 조감독 배창호도 예외 없었다. 대략 3000여편을 돌리니, 30여년이 훌쩍 갔다. 살 드 르누아르는 99년 사라졌다.

형님, 박건섭

문화원은 무엇보다 충무로와 영화 지망생들의 거리를 좁혔다. 학교를 졸업한 이들이 이전까지 도제식으로 영화를 학습했던 것과 달리, 여전히 성기지만 자생적인 ‘시네마테크’의 기능을 문화원이 했다.

“난 그냥 밥이나 사주고 편집이나 도왔다”지만 특히 박건섭(전 신씨네 제작이사)씨의 공이 컸다. 지금은 교수(동서대 영화과 초빙)이지만 당시 아래 연배는 너나없이 ‘형님’이라 불렀던, 71~88년 문화원 영화 책임자였다. 프랑스 단편이든 학생 제작 단편이든 매주 말 단편을 감상하자며 그가 만든 ‘토요단편’(82년 9월)을 기점으로 문화원 영화판은 일층 진화한다. 하지만 그 공은 차라리 약소하다.

“세종문화회관에서 프랑스 영화를 틀곤 했는데 이땐 정부 검열을 받거든요. 프랑스대사관에서 자를 순 없다니까 대신 검열 대목에서 초점을 흐리게 영사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죠. 아, 근데 그 대목들을 어떻게 다 기억해요. ‘4군데 포커스 아웃’이면 그냥 아무데서나 4번 하는 거죠, 뭐. 허허.”

뭐 좀 하겠다더니

‘토요단편’은 활력소였다. 영화 제작이 활발해지며 문화원 세대 안에서 연출, 평론의 경계가 좀더 뚜렷해졌다. 이 모임에 영화를 걸기 위해 학생들은 영화 동아리를 정력적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문화원의 좀더 낭만적이었던 70년대 세대와 좀더 이론적인 80년대 세대가 엄격한 선후배 위계 안에서 깜냥 맞붙기도 했다.

“아사히 판탁스 스틸카메라 렌즈를 8㎜ 카메라에 끼워 줌인 효과를 낸” 곽재용 감독, “정확한 논리로 별명이 ‘저격수’였는데, 잘 못 만든 작품은 봐 줘도 잘난 체는 못 봐줬다”는 정성일 평론가. 휠체어로 이동촬영 기능을 대신했던 김홍준 영상원장(한국예술종합학교), 영사기 두 개로 한 스크린을 채워 와이드 비주얼을 꾀했던 양윤모 한국영화평론가협회장 등 숱한 시네필의 ‘어린 시절’이 박건섭씨의 기억으로, 보관 자료로 한국 근대 영화사를 담은 필름처럼 남아 있다.

99년 영화상영은 막내렸지만 그 ‘체험’ 은 한국영화 자양분으로

이 영화의 엔딩

무엇이든 끝은 있게 마련이다. 83년 문화원으로 첫 발을 뗀 김지운 감독은 “문화원 안의 카페의 맛있는 커피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고 얘기한다. 영화적 집단이나 연대의 의미는 점차 빛을 잃는다. 80년대 중반, 비디오가 등장하면서 문화원은 걷잡을 수 없이 쇠락한다. 이전 세대는 사회로 나갔고, 이후 세대는 비디오를 본다. 김 감독은 “고다르를 만나러 문화원으로 발품을 팔”기도 했지만, “미개봉 영화들을 (비디오로) 틀어주는 명동의 커피숍”을 드나들기도 했던 것이다. 문화원 세대와 비디오 세대가 묘하게 층을 이룬 지점이었다. 이후 문화원은 2001년까지 사간동 자리를 맥없이 지키다, 지금의 중구로 옮겨온다.

언 땅의 문화 해방구란 ‘낭만’이 있고, 시대를 직시하지 않은 이들의 도피처란 ‘냉소’도 있다. 하지만 어떤 하나의 명사로 시대가 설명될 리 없다. 낭만이 지나치게 미화된 것도 사실이지만, 왜곡된 시대가 우리를 친 ‘게토’인 것도 사실이다. 정지영 감독의 말마따나 “여러 번 감상할 수도 없고, 놓친 건 두 시간 후에나 보고, 상영이 아예 끝나면 토론에서 서로가 잘 못 본 거라고 우겨도 결론은 영영 미궁에 빠져 버리”는 그 시절의 영화광들은 그 안에서 겨우 자유로웠던 것이다. 이들의 향수와 낭만, 혹 자괴감이 오롯이 한국 영화의 자양분이 됐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