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4월이면 한국에 자리잡은 지 물경 38년째가 되는 프랑스문화원. 1968년 생긴 이래 문화원은 모든 예술인에게 에스프리를 불어 넣어준 곳이다. 특히 영화인들에겐 둘도 없는 학습 전당이었고, 쉴 수 있는 쉼터, 숨 쉴 수 있는 숨터였다. 지난 6일, 문화원이 새단장 개원식을 열었다. 다시금 일신을 꾀하기 위해서다. 80년대 중반 비디오 시대가 도래하며, 20여년 풀죽어 있던 것에 대한 아쉬움이 베인다. 외국문화원이 한 나라의 문화아카데미로 우뚝 선 것은 지극히 한국적이고 시대적인 현상이었기에 옛날의 영광은 재현하기 어렵겠지만 문화원은 지난 명성을 되찾고, 프랑스 영화를 더 많은 관객에게 소개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실없는 상상으로 시작한다. 만일 그때 ‘프랑스문화원’이 없었다면? 한국 영화는 10년 아니 20년을 퇴보해 있을지 모른다. 제 인생의 8할이든 1할이든 그 곳에 빚 진 이들이 많아서다. 영화감독 정지영, 장길수, 배창호, 박광수, 김홍준, 강제규, 곽재용, 박찬욱, 김지운, 영화평론가 정성일, 양윤모, 부산영화제 프로그래머 전양준, 배우 안성기 등등…. 다 욀라 치면 숨이 턱에 차 닿는다. 이젠 명사가 된 이들이 도란도란 “참두부 하나 시켜놓고 깡(강)소주를 마시던 시절”(박건섭 교수)이었다. ‘영춘관’에서 자장 하나로 주린 배를 어르던 때였다. 연고 없는 종로구 사간동 어디께의 실미집과 중국 음식점. 1970~80년대, 프랑스 문화원이 없었으면 가지 않았을 곳. 그때 그 곳으로 가본다.
편식으로 죽을 노릇
1960년대 중후반, 한국 영화는 절정이었다. 66~70년 한 해 극장 관객수가 연방 1억5000만(역대 최고)명을 넘어섰다. 69년, 흑백 영화도 아주 사라진다. 국내 제작된 영화만도 연간 200편 꼴. 그런데 이상했다. 영화판 상다리가 휘어질 듯 푸짐한데 젊은 식객들, 허구한 날 목 마르고 허기졌다는 것이다. 죄다 문예 아니면 반공 영화인 탓이다. 그 즈음 외국 영화는 한해 20편 정도로 제한됐고 대개 또 미국 상업 영화들이었다. 나라님들은 입맛대로 필름을 잘랐으니, 먹어도 편식 아님 울화통으로 죽을 노릇인 때다. 전양준씨는 그 시절 자신들을 “미학적, 성적, 사회적으로 억압받은 세대”라고 일렀다. 68년 문 연뒤 매주1편씩 영화 상영
당시 억압받던 세대들 자유·해방 맛봐 문화 자유특구 1호 1968년 4월, 프랑스문화원(종로 적선동)이 문을 연다. 음울한 시대, 영사된 빛이든 자유의 빛이든 좇다 보니 그 곳이다. 영화가 온전하게 은막까지 닿는 거의 유일한 장소. 20원 가량 내고 수요일마다 한 차례 감질나게 맛보는 자유였을 게다. 그해 봄, 문화원에 발을 들인 정지영 감독은 미개봉 영화 <히로시마 내 사랑>(알랑 레네 감독)을 빌려와 학교 축제 때 틀었다. 일본 개봉판 제목인 <24시간 정사>로 내걸었다. 시대를 조롱으로 웃음으로 능멸한 셈이다. 학생들은 환호를 질렀다. 문화원 1세대로 불리는 정 감독은 “당시 우리한텐 그 곳을 찾을 수밖에 없는 시대적 답답함이 있었다”고 회고한다. 자유와 해방의 세계를 아련히 체험할 수 있던 문화 특구였던 것이다.
돌리고 돌리고 사간동으로 옮긴 71년부터 프랑스 문화원은 전성기에 이른다. 지하 영상실 ‘살 드 르누아르’(르누아르의 방)는 ‘허가 난 포르노 극장’이란 입소문까지 나며 유명세를 치렀다. “프랑스 문화광, 영화 전공자, 불어 꽤나 할 것 같은 여대생과 여대생을 따라다니던 남학생”(소설가 성석제)까지 넘쳐났으니, 110석짜리 자그만 공간을 하루 최대 6회까지 돌려가며 전력 가동한대도 발 돌린 이들이 많았다. 73년부터 문화원 근속 중인 최재원씨는 “70년대 중반, 인사동 로터리까지 줄을 섰는데 시위하는 줄 알고 경찰이 출동한 적도 있었다”며 웃는다. 본국에서 매달 5~10편씩 새로 들어온 영화에 고다르, 트뤼포, 샤브롤, 브레송이 있었다. 그러면 중독이다. 중학생 정성일도, 고등학생 김홍준도, 대학생 강제규도, 조감독 배창호도 예외 없었다. 대략 3000여편을 돌리니, 30여년이 훌쩍 갔다. 살 드 르누아르는 99년 사라졌다. 형님, 박건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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