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각적 심상. 무척 어려운 표현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그 뜻을 안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국어 시간에 줄기차게 등장하기 때문이다. 교과서에 늘 예문으로 등장하는 ‘푸른 종소리’라던가 ‘소리 없는 아우성’ 같은 표현도 기억날 것이다. 영화는 가장 적극적인 공감각적 매체다. 특히 요즘 극장은 공간감까지 정확하게 고려해 사운드 시스템을 구축하는 터라 집이 아닌 극장에서 관람한 영화는 시각적 청각적 촉각적 경험이 밀접하게 연동돼 우리의 기억에 남는다. 영화에 나왔던 노래나 전투 장면에 몸이 떨렸던 경험이 영화 자체보다 더 오래 기억에 남기도 하는 이유다.
신작 영화 <테넷>이 개봉하면서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과 관련한 담론이 여기저기서 보인다. 이 칼럼은 음악 이야기를 하는 ‘노래로 보는 세상’이므로 노래를 통해 공감각적으로 놀런 감독의 영화 세상을 볼까 한다. 흥미롭지 않은가? 그런데 어쩌지?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영화에는 노래가 없다! 영화음악계의 거장 한스 짐머와 주로 작업했던 터라 가사 없이 영화에 녹아든 오리지널 스코어는 정말 끝내주지만 가사가 붙은 노래는 철저하게 배제돼 있다. 자막이 올라갈 때나 나올까. 내 기억으로 거의 유일하게 영화 안에 인상적으로 등장했던 곡이 <인셉션>에 나왔던 에디트 피아프의 ‘아니요, 전혀 후회하지 않아요’라는 노래다.
왜일까? 그의 영화에 로맨스가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유가 아닐까 추측해본다. 수많은 추종자를 거느린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이 곧잘 비판받는 지점이 바로 영화 속 인물들에게 감정적으로 공감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감독이 만든 이야기 혹은 작전을 펼치기 위해 캐릭터들을 장기판의 말처럼 쓴다는 비판이 꽤 있고 필자도 어느 정도 공감한다. 그게 개성이라면 뭐 할 말은 없지만. 그러니 감정의 층위 중에서도 무척이나 많은 공을 들여야 하는 연애 감정 따위에 아까운 장면을 허비할 리가 없다.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절대 사랑을 하지 않는다! 사랑이 파탄 난 인물은 자주, 너무 자주 등장할지언정 말이다. 그나마 <인터스텔라> 정도가 상당히 인간적인 감정이 많이 들어간 작품인데 이 작품에서조차 남녀 간의 사랑은 흔적도 없고 (역시 주인공의 아내는 죽었다) 아버지와 자식 간의 사랑만 있으니. 내가 알기로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은 스캔들도 없는 가정적인 남편인데 왜….
노래 역시 마찬가지 이유로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영화 세계에서 외면당한다고 짐작해본다. 스토리와 반전, 복잡한 장치 등에 관객이 온전히 몰입하고 또 몰입하기를 바라는데, 노래 가사 때문에 집중이 흐트러지는 위험은 용납할 수 없는 거지.
그가 <라라랜드>나 <어바웃 타임> 같은 뮤지컬 멜로 영화를 하나 찍는 날이 올까? 비참하게 죽은 연인의 비밀을 뒤쫓던 주인공이 고대에 지구에 들렀던 외계인이 남긴 문명을 발견하고 상상 초월의 장치를 통해 다른 차원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 그곳에서 벌어지는 전투에… 뭐 이런 스토리는 아니겠지?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이 자신의 영화에 허락했던 단 한 곡의 노래를 불렀던 가수 에디트 피아프 이야기를 끝으로 칼럼을 마칠까 한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계획하고 통제하고 자기 뜻대로 만들어내는 감독과는 정반대로 에디트 피아프는 인생에서 단 한 가지도 계획대로 되지 않았던 인물이다.
지금은 샹송의 여왕이자 프랑스 국민가수로 추앙받고 있지만 그의 인생은 시작부터 참혹했다. 서커스 단원인 아버지와 정체불명의 엄마 사이에서 태어나자마자 엄마는 도망가 버렸고, 어린 시절부터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그런데 하필 할머니는 사창가 포주였고, 너무나도 열악하고 위험한 환경에서 자란 탓에 에디트 피아프의 키는 140㎝가 조금 넘는 정도에 눈도 거의 멀 뻔했다. 그가 어느 정도로 가난했는지는 가수가 되기 전까지 매춘도 했고 17살에 아이를 출산하자마자 잃어버린 끔찍한 일 등으로 짐작이 간다. 예전에 칼럼에서 다룬 적 있는 재즈의 여왕 빌리 홀리데이의 어린 시절과 도플갱어처럼 겹쳐진다.
가수로 성공하고 나서도 그의 인생은 불행과 불확실성의 연속이었다. 길지 않은 삶 내내 질병과 사고로 죽음의 문턱을 드나들었고, 사랑했던 남자 두 명은 비행기 사고와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점점 소멸해가던 그는 겨우 40대 중반에 30㎏의 몸무게와 의식불명의 상태로 삶을 마감했다. 참고로 그의 일생은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하필 에디트 피아프를 연기한 배우 마리옹 코티야르가 <인셉션>에서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의 죽은 아내로 등장한다. 소름! 이 연결고리가 의도적이었다면 놀런 당신은 대체….
<인셉션>에 등장하는 곡 ‘아니요, 전혀 후회하지 않아요’는 에디트 피아프가 죽음을 맞기 몇 년 전, 그러니까 온갖 불행이 다 닥치고 난 뒤에 부른 말년의 노래다. 보통 사람들은 짐작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불안하고 고통스러웠던 그의 인생을 떠올리면서 들어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인생을 나의 사랑을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며 노래하는 가냘픈 모습을 떠올리면서 들어보자. 겨우 2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두 시간 넘는 영화 <인셉션>의 감동을 느낄 수 있으니.
마지막으로 나만의 음모론을 제기하자면, 이 노래의 길이가 2분 22초, 자막을 뺀 인셉션의 길이가 2시간 22분 정도다. 즉, 이 노래를 60배 느리게 재생하면… 설마 이것도 의도한 건 아니겠지?
에스비에스 라디오 피디·<시사특공대> 진행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