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더미에서 깨어난 남자는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정신 차리고 보니 토끼를 잡아먹었고, 피자가 아니라 ‘피자를 먹는 유민상’ 사진에 침이 꿀꺽 넘어간다. “뭐야, 얘는 왜 이렇게 맛있게 생겼어.” 내가 왜 이러나? 좀비가 됐나?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낫다며 절벽에서 뛰어내려도 안 죽는다. 마음은 급한데 몸이 느리고, 할 말은 많은데 말이 안 나와 답답하다. “이런 젠장할 좀비!”
21일 시작한 월화드라마 <좀비탐정>(한국방송2)은 우리가 알던 좀비의 모습을 살짝 비틀어 웃음을 준다. 이 드라마 속 좀비(최진혁)는 좀비 영화를 본 뒤 “인간에게 잔인하게 죽임을 당하지 않으려면 완벽한 인간의 모습으로 거듭나야 한다”며 1년간 관절 운동을 하고, 젓가락질을 배우고, “간장 공장 공장장은~”을 반복하며 발음 연습도 한다. 인간 김무영의 이름을 빌려 탐정 흉내를 내며 사람들과 섞여 지낸다. 영화 <부산행>, 드라마 <킹덤> 등 대중문화의 주요 소재가 된 ‘좀비’가 이젠 인간과 어울려 사는 단계까지 온 것이다.
뒤뚱거리며 걷는 좀비에서 뛰고 달리는 좀비로, 식욕만 존재하는 좀비에서 머리까지 쓰는 좀비로, 대중매체 속 좀비의 모습은 꾸준히 진화해왔는데, 이 드라마는 좀비의 시선에서 인간을 바라보는 데 초점을 뒀다. 백은진 작가는 “기존 좀비물과 달리 좀비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그리고자 했다. 좀비가 다양한 인간과 관계를 맺으며 어떻게 변화하는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가 핵심”이라고 말했다. 한편으론 김무영이 자신의 과거를 찾는 과정을 통해 ‘좀비보다 더 무서운 건 인간’이라는 좀비물의 주된 메시지도 담아낸다. 백 작가는 “부패한 좀비보다 더 부패한 인간을 응징하고 처벌하는 이야기”라고 덧붙였다.
익숙한 소재를 비틀어 신선함을 안기는 드라마는 또 있다. 새달 7일 시작하는 수목드라마 <구미호뎐>(티브이엔)은 그간 <전설의 고향>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 등 장르를 불문하고 늘 ‘여자’였던 구미호의 성별을 남자로 바꿨다. <구미호뎐>은 이동욱과 김범이 남자 구미호 이연과 이랑으로 나온다. 이연은 백두대간을 다스리는 산신이었지만, 현재는 도심에 정착해 현세를 어지럽히는 요괴를 처단하는 심판자다. 이랑은 이연의 배다른 동생이자 인간과 구미호 사이에서 태어나 한단계 더 진화한 구미호를 보여줄 예정이다.
구미호를 남자로 설정하면서 장르는 공포, 액션, 멜로가 뒤섞인 ‘판타지 액션 로맨스’로 탈바꿈했다. 이 드라마는 도시에 정착한 구미호와 그를 쫓는 프로듀서(조보아)의 이야기다. 드라마 <도깨비>가 무서운 저승사자를 멋진 남자로 재탄생시킨 것처럼, 이 작품은 구미호를 인간을 홀리는 빼어난 외모에 요괴를 제압하는 뛰어난 무예까지 갖춘 존재로 탈바꿈시킨다. 구미호가 ‘간’보다 ‘멋’에 집착하고, 펜트하우스에 살며, 민트초코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 등의 설정이 재미있다.
소재를 비튼 만큼, 배우들이 준비해야 할 것은 더 많다. 기존의 섬뜩한 느낌은 그대로 담아내면서도 <좀비탐정>은 코믹, <구미호뎐>은 액션을 가미해야 하기 때문이다. 김범은 “유기견, 유기묘처럼 ‘유기 구미호’라는 단어를 상상해 이미지를 그렸다. 버려진 동물의 자기방어 같은 날카로움을 표현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그는 “액션 장면에서는 주먹질이 아닌 할퀴는 듯한 동작을 아이디어로 냈다. 토종 여우의 움직임을 연구했다”고 말했다.
<좀비탐정>의 경우, 드라마 방영의 ‘관행’도 비틀었다. 지상파(한국방송), 오티티(웨이브), 아이피티브이(에스케이브로드밴드) 등 세 플랫폼이 협업한 첫 드라마인 이 작품은 에스케이브로드밴드와 웨이브를 통해 매주 토요일 2회를 선공개한 뒤 월·화에 티브이에서 방영한다. 그동안 ‘자사 독점’을 내세웠던 플랫폼들이 힘을 모아 ‘선공개’ 전략으로 차별화에 나선 것이다. 에스케이브로드밴드 쪽은 “플랫폼 경쟁력 제고를 위해 가장 중요한 전략은 콘텐츠 차별화”라며 “제작사들이 콘텐츠 제작에 전념할 수 있게 투자하고 (온라인에서) 먼저 제공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려고 한다”고 말했다.
남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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