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돈은 물처럼 흐른다’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0.1%만 기울기가 달라도 야속하게 흘러가는 물처럼 오직 이윤만을 좇아 흐르는 돈의 흐름을 인위적으로 바꾸려면 섣부른 개입을 자제하고 최대한 냉정하게 경제정책을 설계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거기에 이런 말을 덧붙일까 한다. 돈만 물처럼 흐르나? 문화도 물처럼 흐른다.
앞서 다른 칼럼에서도 지적했듯이 우리나라는 공산품이나 음식, 영화, 문학과 달리 노래만큼은 철저하게 일본산을 배격했다. 군부정권, 민주정권, 보수·진보를 가리지 않고 일본 노래는 늘 방송 불가였다. 그런데도 필자가 어린 시절, 그러니까 1980년대를 거쳐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일본 노래는 여기저기서 참 많이 들렸다. 가장 오래된 기억은 ‘긴기라기니’라는 제목의 댄스곡. 1980년대 일본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린 꽃미남 스타 곤도 마사히코의 노래다. 우리나라에서도 인기가 대단해서 방송 출연 한 번 없이 바닷가 마을에 살던 꼬마들이 흥얼거릴 정도였다.
그 뒤로도 마찬가지. 엑스재팬이나 라우드니스 같은 록그룹은 물론이고 구와타 게이스케, 튜브, 안전지대, 소녀대 등 일본 가수들이 입소문을 타고 우리나라에서 인기를 얻었다. 일본 노래를 그대로 방송에 내보낼 수 없는 점을 이용해 번안곡도 줄을 이었는데 일본 노래인지 모르고 듣기도 했다. 컨츄리 꼬꼬의 ‘오 마이 줄리아’, 정재욱의 ‘시즌 인 더 선’, 화요비의 ‘당신과의 키스를 세어보아요’, 박효신의 ‘눈의 꽃’, 캔의 ‘내 생에 봄날은’ 등 꽤 많다. 그나마 제대로 다시 부른 경우는 낫지, 일본 노래를 표절했다는 시비는 너무 흔해서 필자가 방송국에 처음 입사했을 때만 해도 “일본 노래 안 베낀 가요가 있긴 하냐”는 푸념도 있었다.
이런 분위기는 싹 사라졌다. 이젠 유튜브를 비롯한 스트리밍 플랫폼으로 무제한에 가깝게 들을 수 있는데도 일본 노래는 철저하게 마니아 문화에 머물고 있다. 듣지 말라 할 때는 기를 쓰고 ‘긴기라기니’를 따라 부르더니, 왜 마음껏 들을 수 있는 지금은 안 들을까? 문화는 물처럼 흐르기 때문이다. 일본 가수가 우리나라에서 얻는 인기나 돈이 많을까 아니면 반대로 우리나라 가수가 일본에서 올리는 수익이 많을까. 조사해볼 필요도 없다. 한류 스타가 일본 오리콘 차트를 휩쓸고 초대형 공연장을 매진시켰다는 뉴스는 너무 많이 들어서 새로울 것도 없지만, 일본 가수가 우리나라 음악 차트에 1위를 차지했다거나 올림픽 경기장 공연 표를 매진시켰다는 말을 들어본 사람?
몇년 전만 해도, 이를테면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세계적인 인기를 끌 때도 일시적 현상일 줄 알았다. 혹은 지금이 최고점이겠지 싶었다. 그런데 케이(K)팝이라고 불리는 우리 가요는 매년 최고 실적 신기록을 경신 중이다. 이번 주는 그 정점을 찍었다. 이 칼럼을 쓰고 있는 지금도 빌보드 싱글차트 1·2위에 모두 방탄소년단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 100년이 넘는 미국 팝 음악 역사상 빌보드 1·2위에 동시에 오른 아티스트는 무려 비틀스와 비지스 등 넷밖에 없다. 이미 방탄소년단이 1위를 차지했던 빌보드 200차트에는 블랙핑크가 2위까지 치고 올라가 있다. 우리 여자 가수로는 최고 기록인데 1위를 하지 말란 법도 없다.
필자를 비롯한 40~50대는 우리나라가 백의민족 혹은 제조업 국가인 줄 알고 컸다. 조금 있다가는 수출 강국만이 우리의 살길이라는 군부정권의 구호들이 난무했다. 금탑산업훈장이니 수출역군이니 하는 표현들 어릴 때 참 많이 들었는데, 이제 우리나라는 대내외적으로 그런 선전선동을 할 필요도 없는 위치로 올라섰다. 교역량은 물론이고 품질에서도 우리 물건이 외국제품에 밀리지 않고 ‘미제’, ‘일제’라는 말은 전혀 우월한 느낌을 주지 못한다. 반도체, 가전, 자동차, 휴대폰, 선박… 거기에 문화라는 알짜 품목이 추가된 것이다.
그 옛날 ‘긴기라기니’는 곧 닥쳐올 장기 불황은 꿈에도 모른 채 거품경제의 절정을 과시하던 80년대 일본의 분위기를 그대로 보여준다. 이 노래의 후렴구는 이렇게 반복된다. ‘화려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내 멋대로 너를 유혹하겠어.’ 정말 그랬다. 그 시절 전성기를 구가했던 일본의 화려한 대중문화는 우리 정부에서 아무리 막으려 해도 대한민국 팔도강산으로 흘러들어왔다. 그러나 세월이 지난 지금은? 우리 케이팝의 물결이 화려하게 자연스럽게 전 세계로 흘러가고 있다. 막대한 외화를 벌어주고 국가 브랜드를 쌓아주면서.
짜릿한 동시에 두렵기도 하다. 홍콩 영화나 일본의 대중문화가 그랬듯이 한류도 추억으로 소멸해버릴까 봐. 영원한 건 절대 없다지만 부디 우리 문화의 물길이 오래오래 마르지 않고 흘렀으면 좋겠다. 친환경, 고부가가치, 신기술 응용성 등 미래학자들이 앞으로 유망한 산업의 조건으로 손꼽는 항목을 고루 만족하게 하는 대중문화 콘텐츠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미래 먹거리 아닌가? 개발도상국 시절 제조업 수출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해 우리 정부가 쏟아부은 각종 지원책의 10%, 아니 5%만 문화 수출국의 미래를 위해 투자해주면 안 될까? 이를테면…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에스비에스 라디오 피디·<시사특공대> 진행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