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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이재용 부회장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노래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등록 2020-10-31 06:59수정 2020-10-31 19:53

[이재익의 노래로 보는 세상]

요즘도 대학가에 노래패가 있나 모르겠다. 필자가 대학에 다닐 때는 참 많기도 했는데 그중 으뜸은 연합노래패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하 노찾사)이었다. 민중가요를 부르는 노찾사는 매일 클럽이나 다니고 연애질에 골몰하던 필자에게는 택견 동아리만큼이나 먼 존재였다. 그들을 처음 접한 계기는 술에 취해 나에게 고백을 했던 여자 선배(이하 안경 선배)였다. 그는 철없는 엑스(X)세대 신입생에게 대학생이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의식’을 주입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고 그 일환이 노찾사의 테이프를 선물해주는 것이었다. 내 감성을 전혀 자극하지 못했던 노찾사 2집은 나를 운동권으로부터 더 멀어지게 만든 계기가 되었지만.

다시 노찾사를 만난 건 방송국에 들어온 뒤였다. 처음 라디오 피디(PD)로 현장에 투입되었을 무렵 줄기차게 신청이 들어오던 노래 거북이의 ‘사계’가 원래 노찾사의 노래라는 사실에 놀라 음반실을 찾아가 노찾사의 음반을 뒤적였다. 안경 선배의 강요 없이 들어보니 노찾사 2집 음반은 상당한 수작이었다. 지금까지도 시위 현장에서 불리는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광야에서’ ‘그날이 오면’ 등이 모두 이 음반에 수록되어 있으며 ‘사계’도 그중 한 곡이다.

비발디의 ‘사계’와 마찬가지로 노찾사의 ‘사계’도 사계절을 차례로 노래한다. 봄은 이렇다.

빨간 꽃 노란 꽃 꽃밭 가득 피어도/ 하얀 나비 꽃 나비 담장 위에 날아도/ 따스한 봄바람이 불고 또 불어도/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이후 여름, 가을, 겨울도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라는 후렴이 반복된다.

이 노래는 여러모로 기괴하다. 얼핏 아름다운 가사에 흥겨운 멜로디를 가진 것처럼 들리지만 처음부터 장조가 아니라 단조 노래다. 노찾사 노래 중에서는 가장 리듬이 흥겨운 축이지만 정작 창법은 기계처럼 무심해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1년 내내 방직공장에 갇혀 재봉틀을 돌려야 하는 여공들을 화자로 삼고 있기에 기괴함은 배가된다. 온종일 기계처럼 일하던 그들이 작업장 창문을 통해 겨우 계절의 변화를 엿보는 느낌이랄까. ‘미싱’을 ‘핸들’이나 ‘컨베이어 벨트’로 대체해도 노래의 의미는 바뀌지 않는다. 노동의 현장이 바뀔 뿐.

이런 스산한 산업 현장의 풍경은 무려 200년을 거슬러 산업혁명으로 올라간다. 당시 영국은 콜레라가 창궐하고 유아 사망률도 높아서 전체적인 평균수명이 지금보다 훨씬 짧았다. 지주나 상인들의 평균수명이 50살 정도. 하지만 공업지역 노동자들로 범위를 좁혀보면 충격적인 수치와 맞닥뜨리게 된다. 당시 노동 현장을 조사한 보고서에 따르면 맨체스터 노동자들의 평균수명은 17, 리버풀 지역은 15! 대여섯살 아이들을 공장에 몰아넣고 하루 종일 일만 시켰던 이 시대 작업 환경은 지옥도라는 표현 외에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후 노동 시간을 제한하는 조처가 속속 등장하는데 이조차 노동자들의 인권을 지켜주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좀 더 오랜 기간 사용하기 위해 등장했다고 보는 학자들이 많다.

우리나라 대표 기업 삼성은 어땠을까? 정도의 차이만 있었을 뿐 200년 전 맨체스터와 리버풀의 공장과 과거 삼성의 본질은 비슷했다. 노동자들의 피와 땀을 짜낸 효율의 극대화. 그림자부터 불쑥 이야기했지만 삼성이라는 기업이 거둔 찬란한 성과도 분명히 있다. 결과적으로 삼성은 개발도상국 수준에 머물러 있던 우리나라 경제의 질적·양적 성장을 이끈 주역이다. 이건 수치로 증명되는데, 이를테면 삼성전자의 시가총액은 2위에서 10위까지 기업들 시가총액을 전부 더한 것보다 더 크다. 수출입 품목 통계를 봐도 삼성의 비중은 압도적이다. 지금의 삼성을 키워낸 공로의 꽤 많은 부분은 이건희 회장의 몫이라고 본다.

이제 아버지는 떠나고 아들이 경영권을 물려받았다. 갈 길이 험난하다. 경영권 승계 과정부터 불법적인 의혹들이 많아 장기간 재판이 불가피하고 지난 정권의 국정농단 스캔들 관련 재판도 아직 진행 중이다. 이 칼럼의 성격상, 사법적인 논쟁은 미뤄둔다. 삼성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할 이재용 부회장에게 그저 민중가요 ‘사계’를 들려드리고 싶다.

오직 생산성만을 내세우며 노동자들을 쥐어짜던 풍토가 삼성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시절 곳곳에서 만연했던 문제라 쳐도 잘못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노조도 허락하지 않고, 공장에서 죽어나가는 반도체 노동자들의 절규도 외면하면서, 전방위적인 권력으로 노동운동을 탄압했던 삼성의 과오는 업적만큼이나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과거의 잘못을 사과하고 책임지고 개선하는 일은 새 시대를 위한 첫걸음. 이재용 부회장님. 힘들어도 그 걸음을 떼지 못하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미싱은 잘도 돌아간다고 노래하지만 천만의 말씀. 노동자들이 몸을 갈아가며 돌린 거다. 이제는 그렇게 미싱을, 택배를, 컨베이어 벨트를 돌려서는 안 된다. 이런 글을 노트북 앞에 편히 앉아 끄적거리는 내 모습마저 왠지 죄스러운 밤이다.

이건희 회장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편안히 영면하세요.

고인의 명복과 이름 없이 스러져간 노동자들의 명복을 함께 빌어본다.

에스비에스 라디오 피디·<시사특공대>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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