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원이 처음으로 선보이는 1인극 <콘트라바쓰>. 박앤남공연제작소 제공
10월의 마지막 날 밤. 서울 남산예술센터 지하연습실로 하나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예술대 학생, 교수, 연극인, 스포츠인까지 곳곳에서 모인 20여명의 시선이 오직 한 사람을 향했다. “그 어떤 순간보다 떨린다”며 모두의 시선을 한몸에 받고 서 있는 남자, 배우 박상원이다. “오늘 저의 오픈 리허설에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박상원은 11월7일부터 29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1인극 <콘트라바쓰> 공연을 앞두고 지난달 31일 지인들을 초대해 오픈 리허설을 했다. 개막을 앞두고 공개 리허설을 갖기는 하지만, 배우가 직접 지인들을 초대해 실전 같은 점검을 하는 일은 드물다. “관객의 반응을 살피고 잘 유도해야 하니 미리 경험을 쌓아야죠. 정말 잘해내고 싶어요.” 그만큼 <콘트라바쓰>에 대한 마음가짐이 남다르다는 뜻이다.
<콘트라바쓰>는 박상원이 데뷔 41년 만에 처음으로 도전하는 1인극이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희곡을 원작으로 오케스트라 맨 뒤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콘트라바스(더블베이스) 연주자의 삶을 통해 소외당하는 이들의 자화상을 그리며 희망을 얘기한다. 그는 데뷔 전인 1977년 오태석 연출의 <약장사>를 본 뒤 “언젠가는 1인극을 해보겠다는 꿈을 안고 연기를 해왔다”고 말했다. “혼자서 관객을 들었다 놨다 하는 게 정말 매력적이었어요. 한 사람이 한 작품을 이끌어 간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에요. 힘과 에너지가 필요하죠. 1인극은 마술 같아요.”
하지만 선뜻 시도할 수 없었다. 보통 1시간40분을 배우 혼자서 끌고 가려면 그만큼의 내공이 쌓여야 한다. 그는 “처음부터 데뷔 40년 뒤에 도전할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갖고 있는 콘텐츠가 없으면 보여줄 수 있는 게 없을 것 같았어요. 다양한 감정의 변화, 흐트러짐 없는 에너지, 힘의 분배 능력까지 배우의 모든 역량이 총체적으로 보이는 게 1인극 같아요.” 요즘은 기회를 갖는 것만으로 배우의 가치를 입증해주는 상징성도 지닌다. <인간시장>(1988년) <여명의 눈동자>(1991년) <모래시계>(1995) 등의 드라마로 인기를 얻은 뒤에도 꾸준히 연극 무대에 섰고, 사진 공부 등 늘 끊임없이 새로운 것에 도전하며 자신을 채워왔다. 서울예술대학교 공연학부 연기과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세대의 흐름도 놓치지 않았다.
그래서 오랜 내공이 폭발하는 1인극은 대체로 좋은 작품이 많다. 데뷔 50년 만에 처음으로 1인극을 공연 중인 배우 정동환의 <대심문관과 파우스트>가 대표적이다. 동국대 이해랑예술극장에서 오는 8일까지 선보이는데 호평이 쏟아진다. 도스토옙스키와 괴테의 작품을 1인극으로 재창작해 인간의 본성을 그린다. 살짝 난해하지만 100분 동안 정동환은 연기가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준다. 그는 극 속에서 직접 분장을 지우고 그리며 피에로가 됐다가 악마가 됐다가 시작부터 끝까지 내달린다. 그간 작품에서 보여준 다양한 얼굴이 이 연극에 다 있다. 보고 나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배우 정동환이 데뷔 50년 만에 처음 도전한 1인극 <대심문관과 파우스트>. 아트리버 제공
<콘트라바쓰>도 박상원의 다양한 매력을 극대화해줄 작품이 될 듯하다. 국립 오케스트라 소속 연주자인 화자는 콘트라바스 연주자들을 알아주지 않는 이들에게 분노하다가 소프라노 세라에 대한 짝사랑을 표현하기도 한다. 감정의 변화에 따라 배우의 표정, 몸짓 등이 수시로 달라지는데 그 변화를 보고 있는 게 흥미롭다. 특히 극의 중반 세라를 생각하며 잠시 눈을 감고 멈춰 서는 순간 박상원의 얼굴은 사랑에 빠진 소년의 설렘으로 가득 찬다. 그는 공연을 위해 배운 콘트라바스를 맛보기로 연주하고 무용도 선보인다. 대한민국 1호 남자 무용수에 사진·미술 등 예술에 조예가 깊은 그의 장기가 절묘하게 드러난다. “1인극 중에서 <콘트라바쓰>에 마음을 뺏긴 것도 예술에 관해 얘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와 잘 맞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콘트라바스 연주자는 이 시대의 소외된 이들을 대변한다는 점에서 연기 내내 그런 울림을 깔아놔야 하는 등 연기가 쉽지는 않다. 그는 작품 분석에만 2~3년을 할애했다고 한다. “연출진과 함께 원작을 각색하는 단계를 넘어 작품에 빠져 살았어요. 자다가도 대사가 생각나면 바로 일어나 메모했죠.” 8월 중순부터, 매일 아침 9시부터 밤 9시까지 하루 세번 리허설했다. A4용지로 35쪽 분량의 대본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보고 또 봤다. 그는 “1인극은 연습량이 만만찮더라. 대본 외우기도 쉽지 않았다”며 웃었다. 고독한 인물을 표현하고 싶어 대학교 이후 처음으로 머리카락과 수염을 기르고 안경을 썼다.
1인극은 이게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힘든 연습을 거쳐 무대가 시작되면 매일 혼자서 생방송으로 관객을 만나야 한다. 잠시 무대를 내려가 쉴 틈도, 실수를 도와줄 동료도 없다. 박상원은 “1인극이 이렇게 고독하고 힘든 작업인 줄 몰랐다”면서도 이 작품에 담은 희망을 말한다. “화자는 세상에서 소외됐다고 생각하는 와중에 세라를 꿈꾸죠. 연극적인 상징으로 보면 세라는 희망이에요. 관객들이 이 연극을 보고 나서 더욱 힘차게 살 수 있으면 좋겠어요.”
남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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