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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올드한 예능, 진짜 민주주의 보여주다

등록 2020-11-06 22:22수정 2020-11-07 02:33

[황진미의 TV 새로고침]

<놀라운 토요일―도레미 마켓>(이하 ‘놀토’)이 출연진 교체를 앞두고 있다. <놀토>는 과연 ‘놀라운’ 면이 있다. 관찰예능이 대세인 가운데 스튜디오 예능으로 주말 황금시간대를 3년 가까이 버티고 있으니 말이다. 시즌제나 맛보기 프로그램의 범람으로 예능프로그램 수명이 짧아진 것을 고려하면 놀라운 장수다. 구성은 아주 단순하다. 과한 분장의 연예인들이 노랫말을 맞히고 음식을 먹는다. 과거에 텔레비전을 ‘바보상자’라 부르던 개탄에 걸맞을 유치한 기획이다. 형식도 ‘올드’하다. 교복 입은 연예인들이 나란히 앉아 동요 가사를 맞히고 못 맞히면 머리 위로 쟁반이 떨어지던 <해피투게더―쟁반노래방>이 생각나기도 하고, 한명의 엠시(MC)가 여러명의 연예인을 앉혀놓고 토크와 게임을 진행하던 <일밤―브레인 서바이벌>도 생각난다. 둘 다 2000년대 초 프로그램이니, 복고라면 복고다. 그런데 이상하게 재미있다. 어쩌다 채널을 돌리다 마주치면 넋 놓고 보다가, 80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를 지경이다.

이게 왜 재미있을까. 뜯어보니 엄청난 ‘고퀄’이다. 일단 10시간에 이르는 긴 녹화시간 중 재밌는 부분만 편집했으니 제작진의 피땀을 갈아 넣은 셈이다. 후반 작업도 장난 아니다. 자막과 효과음 등 재기가 넘친다. 내용은 물론이고 서체와 색깔, 타이밍까지 완벽하다.

하지만 진짜 재미는 역시 출연진에서 나온다. 붐, 신동엽, 박나래, 문세윤, 혜리 등 주연급 예능인들이 즐비하다. 영화로 치면 배우 낭비라고 할 만한 호화 캐스팅이다. 그냥 봐도 웃기는 이들이 매회 벌칙 분장 같은 독한 코스튬을 하고 나온다. 심지어 출연진이 문제를 못 맞히면 대신 음식을 먹어치우기 위해 ‘입짧은 햇님’이 출연한다. 게임으로 치면 엔피시(NPC) 같은 존재인데, ‘먹방계’ 스타를 쓰는 것이다.

게스트들도 흥미를 더하지만, 고정 멤버들 간의 상호작용이 안정된 재미를 준다. 고정 멤버들은 나름 서사와 캐릭터를 지닌다. 메인 엠시를 맡을 경력에 패널 자리에 앉아 자신을 내려놓은 듯 슬렁슬렁 정답을 주워 먹는 신동엽, 노래와 춤에 박학다식한 문세윤, 여러 아이디어를 조합해 정답을 추리하는 박나래, 미친 텐션으로 춤을 추다가 번번이 결정적 제보를 날리는 혜리, 우직하지만 진짜 못 맞히는 김동현 등. 이들이 서로 견제하며 웃음이 터진다. 가령 ‘열등생’ 김동현도 출연자와 자막의 놀려먹기 대상이 됨으로써 웃음을 유발한다.

<놀토>는 ‘노래’와 ‘먹방’이라는 잘나가는 예능 요소를 모두 지닌다. 노래는 언제 나온 노래인지에 따라 세대를 탄다. 흔히 중년들은 “요즘 노래는 뭐라 그러는지 하나도 모르겠다”며 단절감을 호소한다. 하지만 프로그램은 “그건 누구나 마찬가지”라고 말해주는 셈이다. 가사가 안 들린다는 사실과 맞히고 싶다는 욕망 앞에 전 세대가 공감한다. 출연자들은 최고의 예능인들이니 춤과 노래를 많이 안다. 맞히면 즉석 공연이 펼쳐진다. 또 가수, 래퍼, 작곡가, 작사가들도 있으니, 노래를 몰라도 추측이 가능하다. 이들이 꼭 맞히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게 하고 그 절실함에 시청자들이 공감하게 만드는 장치가 바로 음식이다. <놀토>는 게임의 보상을 명예나 돈이 아닌 음식으로 줌으로써 ‘먹방’의 효과를 겸한다. 전국 맛집에서 공수한 요리는 훌륭한 볼거리를 제공하며, 즉자적인 승부욕을 자극한다. 허접한 음식도 혼자 못 먹으면 서럽기 마련이다. 하물며 산해진미를 보여주고, 그걸 눈앞에서 맛있게 먹어치우는 광경을 보는 심정이야 오죽하랴.

<놀토>가 즉물적인 욕망만 보여주는 것 같지만, 가만 보면 굉장한 순기능을 지닌다. 바로 민주주의의 장단점을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것이다. 프로그램은 조각난 각자의 정보들이 모여 우여곡절 끝에 정답에 근접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즉 집단지성의 생성 과정을 시뮬레이션 해 보이는 셈이다. 흔히 민주주의의 본질이 투표나 다수결에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냥 다수결로 결정할 테니 각자 생각을 강요하지 말고 빨리 투표에 부치자고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본질은 표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논의를 거쳐 중지를 모아가는 과정에 있다. 구성원들의 적극적이고 열려 있는 대화, 토론, 설득의 과정을 ‘분열’ 혹은 ‘강요’로 치부하여 도외시하는 공동체는 민주적 논의를 진행할 역량이 부족한 것이다.

<놀토>에는 흥미로운 장면들이 목격된다. 중요한 아이디어인데 무시되기도 하고, 표결을 통해 엉뚱한 답을 향해 가기도 한다. 어떤 출연자는 왜 표결해놓고 자꾸 다른 의견이 끼어들어 도돌이표가 되느냐고 진지하게 항의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민주주의의 난맥상은 어느 단체에서나 겪는 일이다. 학교에서 민주주의를 훈련했지만, 성인이 되어서도 민주적 토론이 매끄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모임이 커질수록 회의 절차를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절감하게 된다. <놀토>에서 진정한 쾌감은 여러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져서 처음의 암담했던 상태에서 조금씩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다. 설사 답을 맞히지 못하더라도 논의가 민주적이었을 때 구성원들은 흔쾌히 벌칙을 받아들이지 않던가.

더불어민주당이 당리를 위해 당헌을 뒤집는 결정을 하기 위해 전 당원 표결에 부치고, 26%만 참여한 투표 결과를 근거로 당헌을 뒤집기로 결정했다. 한편 미국은 대통령 선거를 치르면서 우편투표의 기한과 유효성도 확실히 정해놓지 않았다. 이런 난맥상을 겪으며, 민주주의란 무엇이며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골똘히 생각하게 된다. 출연진 교체를 앞둔 요즘, <놀토>가 유난히 재미있고 유익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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