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근하고 인자한 아버지로 우리에게 친숙한 ‘국민 아버지’ 배우 송재호가 7일 별세했다. 향년 83.
한국방송연기자노동조합 관계자는 이날 “송재호 선생님께서 1년 이상 지병으로 편찮으셨다가 작고하셨다”고 밝혔다.
1937년 북한 평양에서 태어난 송재호는 부산 동아대 국어국문과를 졸업하고 1959년 <한국방송>(KBS) 부산방송총국 성우로 데뷔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품었던 영화와 연기에 대한 꿈을 이루기 위해 무작정 서울로 향했다. 1964년 영화 <학사주점>에 출연하며 충무로에 첫 발을 디뎠고, 1968년 86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한국방송> 드라마 오디션에 합격해 특채 탤런트로 선발되기도 했다.
그의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린 건 김호선 감독의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1975)였다. 밑바닥에서 갖은 역경을 겪는 영자(염복순)를 사랑하는 청년 창수를 연기했다. 서울에서만 36만여명의 관객을 모아 흥행에 크게 성공했다. 이후 장미희와 함께 주연을 맡은, 김호선 감독의 영화 <세 번은 짧게 세 번은 길게>(1981)도 큰 성공을 거뒀다.
1980년대 중반부터는 주로 안방극장에서 활약했다. 드라마 <보통사람들> <열풍> <사랑이 꽃피는 나무> <내일은 사랑> <용의 눈물> <부모님 전상서> <장미와 콩나물> <상도> 등 다양한 작품에서 활약했다. ‘국민 아버지’로 사랑받은 것도 이 시기다.
2000년대 들어 다시 충무로에 돌아온 그는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을 비롯해 <그때 그 사람들> <화려한 휴가> <해운대> 등에 출연했다. 지난해 개봉한 <자전차왕 엄복동>과 <질투의 역사>를 마지막으로 그의 작품을 더는 볼 수 없게 됐다. 그는 과거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배우로서 마지막 꿈은 <노인과 바다>의 앤서니 퀸 같은 연기를 해보는 것”이라고 했지만, 건강이 악화되면서 끝내 이루지 못했다.
그는 연기자의 처우 개선을 위해 발벗고 나서기도 했다. 2012년 한국방송연기자노조 일원으로서 <한국방송>을 상대로 밀린 출연료 지급을 촉구하며 촬영거부 투쟁에 참여했다. 그는 당시 라디오 인터뷰에서 “나 스스로 생계 걱정을 안 하지만, 이 돈을 받아야 생활할 수 있는 후배 연기자들을 위해 결심했다”고 말했다.
연기 이외에 사격에도 남다른 애정을 보였다. 취미로 시작한 사격 실력이 선수 수준에 이르러, 실제로 1979년 서울용호구락부 소속 사격연맹에 선수로 등록됐다. 국제사격연맹 심판 자격증도 갖춰 1986년 아시안게임 사격종목 국제심판, 1988년 서울 올림픽 사격종목 보조심판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슬하에 4남 1녀를 뒀다. 2000년 막내아들을 교통사고로 떠나보내고 그 충격으로 단기 기억상실을 앓기도 했다. 장남 영춘씨는 잠시 배우 활동을 하기도 했으나, 지금은 목사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에 차려졌으며, 발인은 10일 예정이다.
서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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