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내가 죽던 날> 스틸컷.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어느 작은 섬의 포구. 배에서 내린 현수(김혜수)의 눈에 저 멀리서 짐수레를 끌고 오는 순천댁(이정은)이 들어왔다. 순간 현수는 대본에도 없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멀리서 다가온 순천댁의 눈에도 눈물이 고여 있었다. 마침내 마주한 둘은 서로 손을 잡고 한참을 울었다. 영화 속 인물인 현수와 순천댁을 넘어, 인간 김혜수와 인간 이정은이 마음과 마음으로 만나는 순간이었다.
11일 개봉하는 영화 <내가 죽던 날>에선 정작 이 장면을 볼 수 없다. 둘이 손잡고 한참을 울 때는 카메라가 돌아가지 않았다. 정식 촬영 전 리허설처럼 움직임을 맞춰볼 때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기 때문이다. 이후 촬영에선 눈물 없이 만나는 장면으로 완성했지만, 말 없이도 통하는 감정의 여운은 고스란히 남았다.
김혜수는 지난 6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한 카페에서 한 인터뷰에서 “현수와 순천댁이 만나고, 김혜수와 이정은이 만나는 순간이었다. 배역과 사람이 모두 일치하는, 잊을 수 없는 그 순간만으로도 이 작품은 나에게 각별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이정은도 지난 9일 같은 곳에서 한 인터뷰에서 “우리가 각기 다른 길로 살아온 삶이 교차하는 느낌이었다. 혜수씨의 눈을 보며 손을 잡는데, 정말 따뜻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내가 죽던 날>은 형사인 현수가 유서를 남기고 사라진 소녀의 흔적을 추적하는 과정을 그리는 미스터리 휴먼 드라마다. 남편의 외도로 이혼 위기에 처하고 교통사고로 휴직까지 하게 된 현수는 지금껏 쌓아온 것들이 송두리째 무너졌다는 생각에 괴로워한다. 힘겹게 복직해, 범죄 사건 증인으로 섬마을에서 보호받던 소녀 세진(노정의)의 실종 사건을 자살로 종결하는 일을 맡았다. 현수는 세진을 마지막으로 봤다는 순천댁을 비롯한 주변을 탐문한다. 현수는 수사를 거듭하면서 세진이 홀로 감내했을 고통에 가슴 아파하며 자신이 겪어온 고통도 마주한다.
영화 <내가 죽던 날> 스틸컷.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김혜수가 영화 시나리오를 받은 건 “좌절과 상처로 무척 지쳐 있을 때”였다. 어머니가 수년에 걸쳐 딸의 이름에 기대 10억원이 넘는 돈을 빌리고 갚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심각한 갈등 끝에 의절까지 한 상황이었다. “내가 배우를 해서 이런 일까지 생겼나 하는 생각에 은퇴까지 고민했어요. 모든 걸 내려놓고 싶은 마음뿐이었죠. ‘이것까지만 하고 그만두자’는 심정으로 근근이 활동을 이어오던 중 <내가 죽던 날> 시나리오를 보고 이건 꼭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제 얘기 같았거든요.”
이정은이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는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촬영과 영화 <자산어보> 마무리 작업으로 한창 바쁠 무렵이었다. 과거에 농약을 마시고 성대를 다쳐 말을 하지 못하는 순천댁을 어떻게 연기해야 하나 걱정도 됐지만 “혜수씨가 한다는 얘기를 듣고 함께 작업하면 좋을 것 같아” 바빠도 무조건 하겠다고 했다. 1970년생 동갑내기인 두 배우가 같은 작품에 출연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연기 호흡은 처음이어도 둘의 인연은 20년 가까이 거슬러 올라간다. 이정은이 2000년대 초반 연극 <타임 플라이즈>를 공연할 무렵, 김혜수가 여기에 출연하는 지인을 만나러 연습 현장을 찾았다. “그때 혜수씨를 처음 봤는데, 호탕하고 멋있었어요. 스타인데 연극도 좋아하고, 우리에게 소품이며 의상도 다 빌려줬어요. 이후 제가 하는 공연을 몇번이나 와서 보고 ‘너무 잘 봤다’고 말해주곤 했어요. 혜수씨는 자꾸 친구 하자고 하는데, 나에겐 아직도 스타이고 굉장히 멋진 배우예요.”
영화 <내가 죽던 날> 촬영 현장에서 배우 김혜수(오른쪽)와 이정은이 꼭 끌어안으며 친밀감을 표시하고 있다.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이정은도 시나리오를 보고 꼭 자기 얘기 같았다고 했다. 2008~2009년 뮤지컬 <빨래> 공연 당시 심한 부상으로 다시는 공연을 못 할 수도 있다는 절망감에 빠졌을 때였다. 누군가가 옆에서 “인생이 참 길어. 금방 끝낼 일이 아니야”라고 말해줬다. 이 말에 힘을 내 혼자서도 병원에 열심히 다녔다. 건강을 되찾으니 정신도 맑아졌다. “영화에서 순천댁이 ‘인생 참 길다’는 얘기를 세진에게 해주는 장면이 나와요. ‘네가 너를 구해야지’라고도 하고요. 제가 겪은 일이 그대로 녹아든 대사여서 더욱 각별했어요.”
김혜수는 영화를 찍으면서 큰 위안을 받았다고 했다. 각기 상처를 가진 현수·순천댁·세진은 말하지 않고도 서로의 고통과 감정을 이해하고 보듬는다. 영화는 이러한 세 주인공의 서사를 통해 ‘여성들의 정서적 연대’에 주목한다. 특히 현수는 마지막에 세진의 실종에 얽힌 비밀을 순천댁과 공유하며 자신의 상처도 치유한다. 이는 인간 김혜수의 치유이기도 하다. “정은씨도 그렇고 극 중 현수의 친구를 연기한 (김)선영씨도 그렇고, 또래 여성 배우들이 제게 대단히 큰 힘이 됐어요. 함께 숨 쉬고 서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응원이 됐다고나 할까요. 노정의 배우와 박지완 감독까지 여성들이 모여 작업하다 보니 공감대와 연대감 같은 것도 느껴졌어요.”
그런 마음과 마음이 더해져 영화 후반부 포구에서 둘이 만나는 명장면을 만든 것이리라. 미스터리 수사극의 외피로 출발한 영화는 지치고 상처 입은 이 시대의 필부필녀를 따스하게 보듬어 안는 데까지 나아간다. 김혜수는 “우리가 영화를 만들며 느낀 위로를 관객들도 극장에서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