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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25년간 살아남은 펑크록밴드 크라잉넛…코로나가 아니었다면 신나게 축하했을 텐데

등록 2020-11-27 17:41수정 2020-11-28 02:33

[이재익의 노래로 보는 세상]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정말 오랜만에 공을 찼다. 아무도 없는 운동장에서 혼자 손흥민 흉내를 내며 한시간 동안 뛰어다녔다. 조기 축구 한번 해본 적 없으면서 마흔 넘어 무슨 짓인가 싶었지만, 그거라도 안 하면 답답해 폭발할 것 같아 다리가 뻐근해질 때까지 슛을 날렸다.

몇년째 다니던 동네 피트니스센터가 문을 닫았다. 코로나바이러스 3차 대유행의 진원지 중 하나였던 서울 서초구 사우나의 확진자들이 그곳에 다녀간 탓에 나에게도 코로나 검사 대상이라는 문자가 왔다. 드디어 올 게 왔다 싶었다. 정말 다시 떠올리기 싫은 기억인데, 보건소에 가서 검사를 받고 밤새 뒤척이다가 다음날 아침에 검사 결과를 통보받았다. 나는 음성이었지만 그 뒤로도 내가 다니는 피트니스센터에서는 확진자들이 속출했고 결국 문을 닫았다. 운동하던 곳이 없어진 중년 남자는 궁여지책으로 혼자 축구공을 들고 텅 빈 운동장을 찾은 것이다.

손흥민 놀이를 하는 내내 만감이 교차했다. 행운을 기뻐해야 할까? 다른 회원들의 불운에 안타까워해야 할까? 그런 감정보다 더 먼저 찾아온 건 공포였다. 집회에 가거나 클럽을 찾은 것도 아니고 그저 운동하는 일상에서도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될 수 있다는 공포. 주변 사람들까지 위태롭게 만들 뻔했다는 아찔함. 이어서 분노가 끓었다. 수십번 슛을 날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차에서 잔뜩 볼륨을 키워놓고 음악을 들었다. 그날 택한 음악은 펑크. 그중에서도 크라잉넛이었다.

20세기 말, 인디록 전성시대에 쏟아졌던 수많은 펑크 밴드 대부분은 대중에게 이름도 채 알리기 전에 사라졌다. 잡초처럼 악착같이 살아남았던 밴드들도 카우치의 지상파 무대 성기 노출 사건으로 확인사살당했다. 그러나 크라잉넛은 아직도 음악을 만들고 무대에 선다. 무려 25년째! 케이팝, 쇼미힙합, 음원 강자 발라드 등이 득세하는 지금도 그들은 당당하게 펑크록을 한다.

그들의 이름을 처음 알린 초강력 선동펑크 ‘말 달리자’, 전무후무 세계지리 펑크록 ‘룩셈부르크’, 초긍정 희망가 ‘좋지 아니한가’,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록발라드 ‘밤이 깊었네’ ‘명동콜링’ 등 크라잉넛은 웬만한 대중가수들보다 히트곡이 많다. 오늘은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곡 ‘서커스 매직 유랑단’의 노랫말을 읊어본다.

‘안녕하세요 우린 매직 서커스 유랑단/ 님 찾아 꿈을 찾아 떠나간다우
동네 집 계집아이 함께 간다면/ 천리만길 발자욱에 꽃이 피리라’

아코디언으로 시작하는 처연한 음률에 낭랑한 노래가 어우러진 뒤 곧장 강력한 펑크록이 터져 나온다.

‘우리는 크라잉넛 떠돌이 신사/ 한 많은 팔도강산 유랑해보세
마음대로 춤을 추며 떠들어보세요/ 어차피 우리에겐 내일은 없다’

폴카와 남사당패 사이 어디쯤에 있을 신명 나는 연주가 흐른 뒤에는 서글픈 노랫말이 이어진다. 자본주의의 노예로 사는 우리의 탄식을 자아내면서.

‘오늘도 아슬아슬 재주넘지만 곰곰이 생각하니 내가 곰이네
난쟁이 광대의 외줄 타기는 아름답다 슬프도다 나비로구나’

좁은 지면에 가사를 다 실을 수 없는데, 꼭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시길. 그룹 이름과 노래 제목만 빼면 온전히 우리말로 쓴 한 편의 시다. 눈을 감고 고개를 까딱거리며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무명시절 무대를 가리지 않고 전국을 떠돌며 공연하러 다니던 철부지 펑크로커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리더이자 베이스 연주자인 한경록이 곡도 쓰고 노랫말도 붙였는데, 김창완·장기하와 더불어 록음악의 3대 음유시인으로 꼽을 만하다.

크라잉넛은 밴드 결성 25주년을 맞이해서 새 음반을 냈다. 연주 실력도 녹음시설도 아쉬웠던 예전 노래들을 다시 연주하고 소리를 다듬은 베스트 음반에 대해 한경록은 이렇게 말했다.

“초창기와 달리 이번 음반은 대한민국 최고의 스튜디오에서 모든 작업을 하고 있어서 어디 내놓아도 뒤지지 않을 퀄리티의 음반이라고 생각한다.”

맞다. 맞는 말인데, 아무리 비교해서 들어도 필자는 조악한 음질로 꽥꽥거리던 그 옛날 크라잉넛이 더 끌린다. 사람마다 다르겠지. 어쨌든 공포와 분노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는 크라잉넛의 노래는 수십번의 슈팅만큼 특효가 있다. 바로 며칠 전에 필자가 확인해봐서 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아니었다면 그들은 25년 동안 펑크록 밴드로 살아남았음을 축하하며 무대 위에서 신나게 춤추고 노래하고 떠들어댔을 거다. 아슬아슬 재주넘으면서도 정작 엉뚱한 놈들에게 돈을 벌어주는 곰 같은 사람들 앞에서, 호기심 많은 동네 아이들도 함께, 외로운 우리의 친구가 되어주었을 것이다.

위로받아야 할 사람들은 널려 있는데 위로조차 받기 힘든 이 지독한 시절이 지나고 나면 난 꼭 그들의 공연장을 찾을 거다. 내일은 없이 오늘만 사는 사람처럼 목이 터져라 따라 부를 거야.

마음대로 춤을 추며 떠들어보세요. 어차피 우리에겐 내일은 없다.

에스비에스 라디오 피디·<시사특공대>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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