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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하나 둘 꿈처럼 사라진다, 꿈의 무대들…

등록 2020-12-14 04:59수정 2020-12-14 09:03

[100도/코로나 여파 속 문을 닫는 문화 명소들]
홍대 앞 인디신을 대표하던 공연장 ‘브이홀’
독립예술영화의 메카였던 ‘상상마당 시네마’
재즈 대중화 앞장 선 클럽 ‘원스 인 어 블루문’
연극인들 터전 됐던 공공극장 ‘남산예술센터’
코로나 쓰나미에 문을 닫게 된 서울 마포구 서교동 공연장 ‘브이(V)홀’ 공연 모습. 브이엔터테인먼트 제공
코로나 쓰나미에 문을 닫게 된 서울 마포구 서교동 공연장 ‘브이(V)홀’ 공연 모습. 브이엔터테인먼트 제공

시련의 시간이다. 코로나19는 우리의 2020년을 앗아갔다. 현재뿐 아니라 과거마저 증발하고 있다. 코로나19 사태 장기화와 맞물려 역사와 추억이 깃든 문화 명소들이 잇따라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이곳에서 꿈을 펼쳤던 예술가들, 그들과 함께 울고 웃었던 이들이 안타까움에 눈물짓고 있다.

지난달 서울 마포구 서교동 공연장 브이(V)홀의 간판이 내려졌다. 홍익대 앞 인디신을 대표하는 대형 공연장이 문을 닫은 것이다. 브이홀을 운영해온 브이엔터테인먼트의 주성민 대표 프로듀서는 일부러 간판을 떼는 현장에 가지 않았다. “직접 보면 가슴 아프고 화날 것 같았어요. 우리 잘못으로 이렇게 된 게 아니어서 더 속상해요.”

브이홀의 역사는 2007년 가수 신해철이 설립한 고스트씨어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홍익대 앞에서 큰 공연장은 롤링홀(스탠딩 400석 규모)과 상상마당 라이브홀(스탠딩 300석 규모) 정도였다. ‘마왕’이라 불리며 심야 라디오 방송 <고스트 스테이션>을 진행하던 신해철은 인디신에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 주성민이 기타리스트로 있던 밴드 스키조의 음반을 제작하기도 했다. 신해철은 “내가 공연장을 만들 테니 맨날 공연하자”며 당시 홍익대 앞 최대 규모인 스탠딩 700석짜리 공연장을 열었다. “2007년 여름, 완공이 덜 돼 에어컨도 안 나오고 사운드 세팅도 안 됐는데도 오픈해버렸어요. 블랙신드롬, 디아블로, 와이비(YB·윤도현 밴드) 등이 공연하는데, 열기로 대기실에 수증기가 차서 사람들이 잘 안 보일 지경이었죠. 해철이 형이 동생들 만나러 와서는 ‘좀 덥지?’ 하며 웃던 기억이 생생해요.” 주성민이 당시를 떠올렸다.

코로나 쓰나미에 문을 닫게 된 서울 마포구 서교동 공연장 ‘브이(V)홀’ 공연 모습. 브이엔터테인먼트 제공
코로나 쓰나미에 문을 닫게 된 서울 마포구 서교동 공연장 ‘브이(V)홀’ 공연 모습. 브이엔터테인먼트 제공

하지만 운영이 쉽지 않았다. 투자자와의 다툼도 끊이지 않았다. 결국 신해철이 손을 떼고 블랙신드롬의 박영철이 인수해 2008년 11월 브이홀로 재단장했다. 주성민이 운영진에 합류한 것도 이즈음이다. 2009년 박영철마저 빠지자 주성민이 공연장을 지켰다. 인디 밴드 기획공연을 만들고, 외국 밴드 내한공연도 유치했다. 헬로윈, 스트라이퍼, 파이어하우스, 스틸하트 등 왕년의 헤비메탈 밴드는 물론, 제프 버넷, 커린 베일리 레이 등 팝스타도 공연했다. 이승환, 부활 등이 장기공연을 하기도 했다. 인디 음악인들에게 브이홀은 ‘꿈의 무대’였다. 이곳을 채울 수 있느냐가 성공의 기준이 됐다.

그랬던 브이홀도 코로나 쓰나미 앞에선 속수무책이었다. 공연장 매출이 10분의 1로 줄었는데도 임대료·관리비로 매달 1600만원씩 나갔다. 뮤지컬 등 다른 공연은 ‘좌석 거리두기’를 해서라도 진행하는데, 스탠딩 공연장은 문을 열 수도 없는 기간이 길어졌다. 결국 지난 9월 폐관을 결정했다. 소식을 듣고 이승환, 노브레인 등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했다. 노브레인의 이성우는 “밴드 데뷔 20주년 공연도 했고, 크라잉넛·레이지본 등과 함께 매년 ‘세이브 더 펑크록’ 공연을 열어 뛰어놀던 곳이 사라진다니 내 팔다리가 잘려나가는 느낌”이라며 아쉬워했다. 초창기부터 함께해온 단골 관객 윤나래(34)씨는 “이곳에 쌓인 나의 추억도 함께 사라지는 것 같아 가슴 아프다”고 말했다.

코로나로 운영이 중단된 서울 홍익대 앞 ‘상상마당 시네마’. 케이티앤지 상상마당 제공
코로나로 운영이 중단된 서울 홍익대 앞 ‘상상마당 시네마’. 케이티앤지 상상마당 제공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홍익대 앞 문화 명소가 또 있다. 복합문화공간 케이티앤지(KT&G) 상상마당 안 영화관 ‘상상마당 시네마’다. 케이티앤지가 문화공헌사업의 하나로 2007년 상상마당을 개관할 때 만든 상상마당 시네마는 단순한 영화관 이상이었다. 상상마당은 아예 영화사업부를 만들어 독립예술영화 제작·배급·상영을 해왔다. 연상호 감독의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을 비롯해 영화 <족구왕> <반짝이는 박수 소리> <이태원> 등이 덕분에 관객들과 만났다. 음악영화제, 단편영화제 등 기획전도 꾸준히 열었다.

하지만 올해 코로나19 사태를 맞아 상상마당 시네마는 지난 2월 이후 두달만 빼고 내내 휴관 상태다. 상상마당을 위탁 운영해온 컴퍼니에스에스(SS) 관계자는 “지난 10월 케이티앤지로부터 ‘컴퍼니에스에스와 영화사업부를 더는 함께하지 않겠다’는 통보를 받았다”고 전했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이곳을 통해 영화를 배급한 김종관·신연식·연상호·이길보라 감독 등 18명은 지난 10월 말 “상상마당 시네마와 영화사업부를 지켜달라”고 호소하며 온라인 서명운동을 벌였다. 그러자 케이티앤지는 의견문을 내어 “상상마당 시네마는 문을 닫지 않는다. 더 좋은 공간과 콘텐츠로 지원할 방안을 고민하며 재정비 차원에서 공간(운영)을 임시 중단한 상태”라고 해명했다.

코로나로 운영이 중단된 서울 홍익대 앞 ‘상상마당 시네마’. 케이티앤지 상상마당 제공
코로나로 운영이 중단된 서울 홍익대 앞 ‘상상마당 시네마’. 케이티앤지 상상마당 제공

그럼에도 의혹은 가라앉지 않고 있다. 현재 영화사업부는 해체된 상태로, 소속 직원은 올해까지만 근무하고 떠나야 한다. 다만 일부 직원이 남아 기존 배급작 관리를 이어갈 예정이다. 감독 18명은 지난달 27일 두번째 성명을 내어 “영화관만 남고 영화사업부와 직원들이 사라지는 건 의미가 없다”며 다시 한번 호소했다. 이길보라 감독은 “코로나로 힘든 상황은 이해하지만, 케이티앤지가 이윤 추구를 위해 이 사업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회공헌 목적이라면 상생하는 방안을 고민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케이티앤지 문화공헌부 관계자는 지난 9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대비해 더 나은 공간으로 만들기 위한 방안을 논의하며 내년 사업과 예산을 짜는 중이다. 구체적 방안이 정해지는 대로 발표하겠다”고 밝혔다.

지난달 14일 공연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은 서울 청담동 재즈클럽 ‘원스 인 어 블루문’. 원스 인 어 블루문 제공
지난달 14일 공연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은 서울 청담동 재즈클럽 ‘원스 인 어 블루문’. 원스 인 어 블루문 제공

22년 역사를 품은 서울 강남구 청담동 재즈클럽 ‘원스 인 어 블루문’은 지난달 14일 공연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았다. 코로나19 사태로 올해 내내 어려움을 겪어온데다, 결정적으로 새 건물주가 재건축을 추진하면서 자리를 비워야 했다. 1998년 문을 연 이곳은 국내에 재즈클럽의 고급화와 대중화를 함께 이룬 상징적 장소다. 드라마 <파리의 연인> <내 이름은 김삼순> 등을 촬영했는가 하면 윈턴 마살리스, 팻 메시니 등 세계적인 재즈 연주자가 내한공연 왔다가 이곳에 들러 자유로이 연주하기도 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단골인 거스 히딩크 감독이 한국 국가대표팀 경기를 마치자마자 이곳으로 달려와 클럽을 뒤집어놓은 적도 있다.

연인들의 데이트나 프러포즈 장소로도 유명했다. 임재홍 사장은 “노래나 피아노 연주에 자신 있는 분이 다른 손님들 양해를 구하고 올라가 프러포즈한 적도 많다. 남자가 바들바들 떨면서 편지를 읽으면 손님들이 ‘키스해, 키스해’라고 외치며 격려해주곤 했다”고 전했다. 마지막 날 이곳을 찾은 어느 부부는 “우리가 여기서 프러포즈해 결혼했는데…”라며 아쉬워했다고 한다.

2008년 이곳에서 데뷔 무대를 한 재즈 보컬리스트 김혜미는 마지막 공연에서 기어이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친정집처럼 제일 편한 무대였다. 나중에 나이 들어서 마지막 무대도 이곳이었으면 했는데, 없어진다고 하니 울컥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22년째 단골손님인 진권수씨는 “우리나라에서 여기만큼 재즈 문화를 잘 유지해온 곳도 없다”며 “같이 음악 듣던 오랜 친구를 떠나보내는 기분”이라고 서운함을 나타냈다.

지난달 14일 공연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은 서울 청담동 재즈클럽 ‘원스 인 어 블루문’. 원스 인 어 블루문 제공
지난달 14일 공연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은 서울 청담동 재즈클럽 ‘원스 인 어 블루문’. 원스 인 어 블루문 제공

가뜩이나 코로나19로 어깨가 처진 연극인들을 더욱 안타깝게 하는 소식도 들린다. 한국 연극계를 대표하는 공공극장인 서울 중구 예장동 남산예술센터가 올해를 끝으로 문을 닫는다. 코로나19 때문은 아니다. 운영 주체인 서울시와 공간의 법적 소유주인 서울예대가 올해를 끝으로 계약을 종료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연극인들은 상징적인 공공극장을 보존해야 한다며 반발하고 있지만, 코로나19 사태에 묻혀 쟁점화하지 못한 채 흐지부지돼버린 상황이다.

남산예술센터의 전신인 드라마센터는 극작가 겸 연출가인 동랑 유치진이 미국 록펠러재단 지원과 한국 정부 토지 제공을 받아 1962년 개관한 한국 최초의 현대식 민간극장이다. 이곳을 서울시가 2009년부터 매해 10억원을 내고 임대하면서 공공극장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서울문화재단이 위탁 운영하는 남산예술센터는 박근혜 정부 당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의 엄혹한 상황에서도 검열, 세월호 등 사회 비판적인 메시지의 작품을 올리며 위상을 높여왔다.

올해로 문을 닫는 연극인들의 터전인 남산예술센터. 서울문화재단 제공
올해로 문을 닫는 연극인들의 터전인 남산예술센터. 서울문화재단 제공

남산예술센터 자리에 에스엠(SM)엔터테인먼트와 종로학원이 손잡고 만든 케이팝 아이돌 육성기관 에스엠인스티튜트가 들어오기로 지난 9월 발표하면서 연극계 반발은 더욱 거세졌다. 에스엠인스티튜트는 현재 비어 있는 건물인 심재순관만 쓴다고 해명했지만, 연극인들은 남산예술센터가 나가고 나면 공연장이 있는 드라마센터 건물까지 쓰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해 서울예대는 별다른 의견을 밝히지 않고 있다. 우연 남산예술센터 극장장은 “공공극장의 위상을 제대로 세우려면 임대와 민간 위탁 운영 방식 말고 근본적인 ‘리부팅’을 해야 한다. 이를 위해 서울예대와 서울시, 정부는 책임 있는 소통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장은 시련의 시간이 언제 끝날지 앞이 보이지 않지만, 이들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임재홍 사장은 무대 뒤에 붙어 있던 ‘원스 인 어 블루문’ 네온사인을 떼어 왔다. “언젠가 다른 곳에 다시 열면 붙이려고 종갓집 씨간장처럼 잘 보관 중”이라고 했다. 김혜미도 “원스 인 어 블루문이 꼭 돌아올 거라는 믿음이 있다. 전처럼 크고 화려한 클럽이 아니더라도 꼭 다시 돌아가서 노래하고 싶다”는 바람을 나타냈다. 박상현 극작가 겸 연출가는 남산예술센터 폐관을 두고 “섭섭하고 아쉽지만, 이제는 이후를 생각할 때다. 길게 보고 온전한 공공극장으로 재탄생하길 기대하며 우리가 할 수 있는 걸 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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