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니 방송국에서 일한 지 딱 20년이 됐다. 그 세월 동안 남들보다 더 가까이에서 가요계를 지켜본 지금 단언할 수 있다. 올해는 우리 가요 역사상 최고의 한 해였다. 20년을 놓고 보면 확실히 그렇고, 그 전에 팬으로서 가요를 즐겨 들었던 10년쯤을 더해도 결론은 같다. 2020년은 우리 가요의 새로운 원년으로 봐도 좋다. 짧은 지면을 빌려 올 한 해 우리 가요계의 사건을 정리해본다.
방탄소년단(이하 방탄)이 세계 팝 시장의 최강자로 자리매김했다. 수입 면에서도, 각종 차트 순위를 봐도, 유튜브 조회수를 들이대도, 소위 빅데이터를 들여다봐도 그러하다. 실질적으로는 방탄이라는 단 하나의 상품만 파는 빅히트엔터테인먼트는 시가총액 기준으로 대한항공이나 삼성중공업, 이마트보다 훨씬 더 커져 버렸다. 이름 따라간다는 옛말대로 정말 빅히트, 대박이 났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에서는 아예 2020년 세계 최고의 엔터테이너로 방탄을 선정했다. 올해를 기점으로 방탄은 뉴키즈온더블록이나 원 디렉션 같은 아이돌 밴드의 차원을 훌쩍 넘어 비틀스나 마이클 잭슨과 같은 전설의 반열에 들어서고 있다. 다음달에 있을 ‘그래미 시상식’에서 상을 받느냐 마느냐와 상관없이 말이다.
지난해 여름 방탄을 주제로 무려 네 편의 칼럼을 연달아 쓴 적이 있다. 그때는 너무 과찬을 하나 싶었는데 지금 다시 읽어보니 성과에 비해 표현이 초라하다. 2021년의 방탄은 어떨까? 그들이 더 올라갈 높이는 없다. 그저 지금까지 그러했듯 언어와 피부색을 초월한 위로와 즐거움을 선사해주기를 바랄 뿐.
방탄소년단의 <라이프 고즈 온>. 빅히트엔터테인먼트 제공
블랙핑크를 빼놓고 올 한 해 가요계를 정리하면 안 되지. 방탄이 워낙 압도적이어서 그렇지 블랙핑크가 새 앨범을 통해 보여준 위세 역시 예전의 가요계에서 본 적 없는 수준. 해외에서 거둔 엄청난 성과뿐 아니라 국내로 무대를 한정해도 마찬가지. 회사가 생긴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아 쓰러져 있던 와이지엔터테인먼트를 말 그대로 멱살 잡고 일으켜 세웠다. 그저 작곡가가 아니라 블랙핑크의 모든 것을 총괄하는 천재 프로듀서 테디의 감각은 절정에 이르렀다. 블랙핑크의 뮤직비디오를 보다가 미국 팝 아티스트의 뮤비를 보면 심심하거나 촌스러울 지경. 휴. 블랙핑크 때문에 눈이 높아지고 귀가 까다로워져 큰일이다.
이날치밴드와 씽씽밴드를 위시한 국악의 가요화도 올해의 큰 수확이다. 그들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부터 망설여진다. 국악 아티스트? 국악인? 퓨전 국악? 국악 밴드? 그렇다. 그들은 전에 없던 존재들이고 과거의 언어로 정의조차 내릴 수 없다. 관광공사가 이날치밴드의 음악에 앰비규어스 댄스 컴퍼니의 춤사위 영상을 입혀 배포한 영상은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정부 홍보물로 등극했다. 정말 깜짝 놀랐다. 내가 하품하면서 지나쳤던 팔도 관광지들이 이렇게 멋져 보이다니! 아직도 못 본 분들이 있다면 이 칼럼을 잠시 내려놓고 당장 ‘이날치 밴드 관광공사’부터 검색해보시길. 오래전에 서태지나 육각수가 시도했던 국악과 가요의 만남 정도를 생각하면 오산이다.
추천곡을 몇 곡 골라볼까? 입문용으로는 이날치밴드의 ‘범 내려온다’가 무난할 테다. 개인적으로 올 한 해 가장 많이 들었던 노래는 악단광칠의 ‘영정거리’다. 악귀를 물리치는 주술과 같은 노래를 출퇴근길에 들으며 우울과 분노를 적지 않게 씻어냈다. 방탄의 멤버인 슈가가 솔로 프로젝트 어거스트 디의 이름으로 발표한 노래 ‘대취타’도 곁들여보시길. 이디엠(EDM)보다 더 신나고 힙합보다 더 그루브하면서 동시에 록음악보다 더 선동적인 음악이 있을 줄이야. 이제 가요의 한 장르가 된 국악을 두 팔 벌려 환영한다. 얼쑤.
이날치-엠비규어스 한국관광공사 광고. 한국관광공사 제공
좋았던 것들만 얘기했는데 트로트에 대해선 우려를 표하고 싶다. 그 누구보다 트로트 장르를 사랑하는 팬으로서 올해 정점을 찍은 열기가 매너리즘으로 빠지는 건 아닐까 걱정된다. 얼마 전에 시작한 <미스 트롯 2>가 엄청난 시청률을 기록한 와중에 무슨 쓸데없는 걱정인가 싶기도 하지만, 노래도 그렇고 방송 프로그램도 그렇고 다 비슷비슷해서 이제 지겹다는 목소리가 자꾸 들린다. 바다에서도 치어는 보호하고 조업금지 기간을 두는데 한정된 어장에서 너무 탈탈 털어가며 남획하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보았으면 좋겠다. 특히 방송 관계자들이.
우리 가요계는 내년에 더욱 기대된다. 상반기에는 어렵더라도 하반기쯤에는 코로나바이러스가 물러가고 관객들이 함께하는 공연이 가능해질지도 모르니까. 좋은 영화는 핸드폰으로 봐도 좋지만 극장에서 보면 더 좋은 것처럼 음악도 마찬가지. 이날치밴드의 음악은 관광공사 홍보 영상으로 봐도 멋지지만 공연장에서 어깨춤을 추며 즐겨야 제맛 아니겠는가? 나훈아의 그 엄청난 공연에 관객 수만명이 모여 함성을 질렀다면 어땠을까? 그런 끝내주는 맛을 우리만 독식하는 건 너무 이기적이니, 지금껏 그랬듯 내년에도 다른 나라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게 좋겠다. 이왕이면 우리나라에 놀러 와서 즐겨주면 더 좋고.
모두에게 힘들었던, 대부분에게 끔찍하고 지긋지긋했던 한 해가 끝나가고 있다. 동트기 직전이 제일 어둡다고 하니 지금이 최악일지도 모르겠다. 힘겨운 시절 우리를 달래준 가수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내년에는 무대에서 봐요! 올 한 해 제 글을 읽어주신 독자님들도 감사했습니다.
에스비에스 라디오 피디·<시사특공대> 진행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