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설날 특집 예능프로그램의 승자는 <골 때리는 그녀들>(에스비에스)이었다. 2부작으로 방송된 프로그램은 지상파 예능 중 시청률 1위를 차지했다. <우리 동네 예체능> <뭉치면 찬다> <뭉치면 쏜다> 등 스포츠 예능이 있었지만, 남성들만의 무대였다. <노는 언니>(이채널) 웹예능 <오늘부터 운동뚱> 등으로 여성 스포츠에 관심이 쏠린 지금, 여성축구 예능은 시의적절한 기획이다.
4팀의 4경기를 치르며, 박진감 넘치는 승부가 펼쳐졌다. 선수들의 놀라운 기량과 투혼은 재미와 감동을 안겼다. 하지만 울화와 서글픔도 밀려왔다. 기획 취지와 선수들의 선전에 비해, 프로그램의 구성과 제작진의 태도가 너무나 무성의하고 무례했기 때문이다. 늘 배제당하던 여자들은 어렵게 얻은 기회에 언제나 진심으로 최선을 다하며 새로운 경험과 성취에 기뻐한다. 하지만 남자들은 장난처럼 기회를 던져주고는 ‘여자들이 저것도 하네’ 하며 신기한 듯 조롱하기 일쑤다. 프로그램은 이런 ‘여혐 사회’의 축소판처럼 보인다.
자막과 이수근의 해설은 가히 최악이었다. 가령 서두의 인터뷰 장면을 보자. 한채아는 “남자들처럼 야외에서 뛰면서 유산소 운동을 즐겁게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조기축구회를 알아보기도 했다”고 말한다. 프로그램의 취지를 정확히 관통하는 말이다. 그런데 자막은 “축구 금수저 집안” 따위로 붙는다. 남편 운운하는 자막과 이수근의 조롱이 경기 내내 계속된다. 헤딩하면 “(헤어)핀 꽂은 자리에 공이 맞았다”고 하고, 뛰어난 기량을 펼치면 “남자축구를 보는 줄 알았다”고 한다. 여성 선수에 대한 존중 없이 가십으로만 소비하며, 잘하면 ‘남자 같다’고 하거나 ‘남편에게 배웠다’고 말한다. 이것도 사회생활을 하는 여성들이 지겹도록 겪는 ‘여혐’ 아닌가.
프로그램의 구성도 안일하다. 세상에, 감독과 선수가 경기 당일에 처음 만나다니! 제작진이 <뭉치면 찬다>(제이티비시) 정도의 진지함을 가졌더라면, 감독과 선수가 미리 만나 훈련을 하고 전략을 짜는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 연습 장면 분량이 모자랐던 탓인지, 프로그램은 개막식이라며 2002년 월드컵 4인방이었던 감독들을 장황하게 소개하며 당시 자료화면을 길게 담았다. 그 결과 개막식에서 남성 감독들이 주목을 받고, 선수들은 박수부대처럼 들러리 서는 상황이 빚어졌다. 승부가 남성 감독들 간의 자존심 대결인 양 말하는 이수근의 멘트도 문제거니와 경기 당일에 선수를 만나 어색해하는 감독의 모습도 민망했다. 여고생처럼 “첫사랑 이야기해주세요”라며 장난치는 선수들의 모습이나 나이와 호칭 문제로 곤란해하는 감독의 모습은 왜 넣은 걸까.
이수근은 여자축구 중계가 ‘최초’임을 강조하며, 여자축구를 우스꽝스러운 볼거리인 양 호들갑을 떨어댔다. 마치 세상에 여자축구가 존재하지 않으며, 남자축구의 예능적 패러디인 양 취급하는 태도다. 그러나 세계 여자축구의 역사가 100년을 넘는다. 한국에서도 1990년 아시안게임에 맞춰 국가대표팀이 만들어졌고, 여자월드컵 본선에 2회 연속 진출했다. 2009년부터 실업 8개 팀이 소속된 여자축구 리그도 운영 중이다. 그 밖에도 초등, 중등·고등, 대학 팀과 동호회가 있다.
이런 사실을 <에스비에스>가 모를 리 없다. 2019년 9월에 <영재발굴단>에서 광양중앙초등학교 여자축구부의 선수들을 보여줬다. 12월에는 태안의 유소년 축구클럽에 소속된 이지희 선수의 놀라운 기량과 사연을 콜린 벨 여자축구대표팀 감독의 극찬과 함께 전해주지 않았던가. 여자축구를 이색 볼거리로 취급하는 이수근의 태도는 여자축구의 역사와 현존을 모조리 지우는 것이다. 애초에 이수근이 왜 그 자리에 있는 걸까. 에이(A)매치 중계를 하던 배성재 아나운서 옆에는 여자축구를 잘 아는 해설가가 나왔어야 한다. 가령 지소연, 여민지, 김아름, 전가을, 이소담 선수, 또는 홍은아 축구협회 부회장, 권예은 해설위원 등을 섭외해야 하지 않았을까.
국내 여자축구 동호회가 활성화된 지도 10년 가까이 된다. 연예인이 속한 동호회도 있다. 래퍼 키썸, 뮤지션 지젤 등이 속한 ‘팀 퍼스트 우먼즈’도 있고, 오하영, 김세정 등 아이돌이 주축인 ‘에프시(FC) 루머’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여자의 축구 사랑을 믿지 않는다. 자꾸만 연애나 결혼 등 남자와의 관계를 엮어댄다. 심지어 작년의 ‘에프시 루머’ 창단 소식에 동명의 남자 연예인 축구단과 연애를 하기 위함이라는 팬들의 오해에 멤버들이 진땀을 빼며 해명해야 했다.
영화 <슈팅 라이크 베컴>이 개봉한 지 20년째이지만, 여전히 여자아이들의 운동장 사용은 어렵고 축구하는 여자들은 ‘골 때리는’이란 제목으로 조롱당한다. 이란 영화 <오프사이드>(2005)에는 축구 관람을 금지당한 소녀들의 저항이 나온다. 실제로 이란에서는 최근 축구 경기를 보려다 체포됐던 여성이 분신한 사건이 있었다. 어떻게 해야 여자들이 축구에 진심이라는 사실을 믿겠는가. 여자들이 운동하면 몸매 관리로 치부할 뿐, 건강 증진, 체력 강화, 스트레스 해소, 성취감 고취, 팀워크 증진을 목표로 삼는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여자도 사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이토록 어려운가.
올해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은 “전세계 축구계의 화두이자 블루오션인 여자축구의 저변 확대”를 공언하였다.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마녀체력> <여자가 운동을 한다는데> 등의 책에서 보듯, 여성 생활 스포츠의 요구도 커지고 있다. 여기에 여성 예능인의 약진까지 삼박자가 고루 갖추어진 지금, 훨씬 진지한 기획으로 여성 축구 예능이 정규편성되길 바란다.
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