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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노르만족 신화의 학원물 버전 ‘라그나로크’

등록 2021-02-26 16:31수정 2021-02-27 02:33

노르웨이 방송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것은 2010년, <슬로우 티브이>라는 프로그램이 ‘대박’을 쳤을 때다. 인구 500만명의 노르웨이에서 300만명 이상이 동시에 봤다니, 대체 어떤 내용이기에. 불타는 모닥불 12시간 생방송, 양털을 깎아 실을 뽑고 옷을 만드는 8시간 30분 생방송, 끝없이 달리는 7시간 30분 기차여행 생방송…. 요즘으로 치면 자율감각 쾌락반응(ASMR·에이에스엠아르) 콘텐츠 같은 프로그램이니 시대를 앞서간 걸까? 아무튼 서울의 편집실에서는 30분의 1초 단위로 잘라 붙인 뒤 자막과 그래픽을 꽉꽉 채워 넣는데, 노르웨이 방송국에서는 그냥 카메라 한 대로 아무 가공 없이 생방송을 해도 시청률이 높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잠을 쫓기 위해 커피를 마시며 다음 생에는 꼭 노르웨이 피디로 태어날 거라고 다짐했다. 하지만 오늘의 드라마는 노르웨이에서 만들었지만 <슬로우 티브이>와는 결이 다르다. 상징적이며 치밀하다. 2020년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라그나로크>다.

<라그나로크>는 북유럽 노르만족의 신화에 나오는 세상의 종말을 뜻하는 말이다. 성경에 나오는 아마겟돈을 생각하면 된다. 신들과 거인들이 대전투를 벌인다. 천둥의 신 토르가 사악한 로키와 바다뱀 요르문간드를 죽이고 그 뒤에는 새로운 세상이 탄생한다고 한다. 거대한 북유럽 신화를 이렇게밖에 설명하지 못하니 그저 죄송할 따름이다. 드라마를 보기 전까지 라그나로크는 온라인 게임인 줄 알았고 토르는 마블 히어로로 알고 있던 사람이니 용서해주길 바란다. 신화가 탄생한 노르웨이에서 만든 이 드라마에는 당연히 라그나로크 전설 속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놀랍게도 고등학교 학원물이다.

고등학생 망네는 엄마와 함께 에다라는 도시로 이사를 온다. 마을에 도착한 순간, 어느 신비한 할머니를 만나고 초능력을 갖게 된다. 누가 봐도 망네는 천둥의 신 토르처럼 생겼고, 그의 배다른 동생은 어벤져스에서 로키 역을 맡았던 톰 히들스턴과 똑같이 생겼으니 앞으로의 전개가 더 궁금해진다.

에다는 북유럽 도시들이 그렇듯 자연이 아름답지만, 어딘가 을씨년스럽다. 마을 사람은 모두 유툴이라는 대기업과 직장, 학교, 사회사업 등으로 엮여 있는데 이 기업은 4명의 가족이 지배하고 있다. 사실 이들은 3000년 동안 죽지 않고 생을 누리는 고대의 거인들이다.

아름다운 산과 호수가 유툴에 의해 조금씩 파괴된다고 믿고 이를 알라기 위해 애쓰던 망네의 단짝친구가 패러글라이딩 사고로 죽는다. 그의 죽음이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고 믿는 망네. 과연 그는 초능력을 활용해 거인들을 물리치고 세상을 구원할 것인가?

엄청난 힘을 가진 망네지만 현실에서는 평범한 학교생활조차 쉽지 않다. 난독증에 시달리고 화를 잘 참지 못한다. 생각해보면 큰 망치를 던질 수 있고, 화가 나면 번개를 부르고 남들보다 빨리 달리는 능력이 있다고 한들, 오늘날의 세상과 맞서 싸우기는 역부족이다. 드라마에서처럼 과대망상으로 심리상담을 받거나 사고뭉치로 몰려 퇴학당할 걱정을 해야 한다.

엄청난 능력을 갖춘 거인들도 현실에서는 최선을 다해 기업을 운영한다. 세상을 파괴하려고 오염물질을 쏟아내는 것이 아니라 수익을 추구하다 보니 환경문제에 둔감해졌을 뿐이다. 유툴의 실체가 공개된 원인도 영웅의 활약 때문이 아니라 빙하가 녹아 그 속에 숨겨둔 공간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드라마는 고등학교 학원물이다. 대기업에 맞서 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댄스파티에 누구랑 가야 할지도 중요하다. 신들의 전투도 힘들지만, 친구와의 오해를 푸는 것은 더 힘들다. 그래서 히어로물은 고등학교를 좋아한다. 평범한 주인공이 남들과 다른 나를 발견하고 성장하기엔 고등학교 만한 곳이 없다. 우리가 꼭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유치원에서 배웠다면, 우리가 굳이 몰라도 될 세상의 쓴맛은 고등학교 때쯤이면 거의 알게 되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노르웨이의 <슬로우 티브이>는 결국 피오르드를 여행하는 크루즈 앞에 카메라 하나를 붙이고 134시간 동안 생방송을 해서 기네스북에 올랐다. 하지만 <라그나로크>는 40분 남짓 런닝 타임에 6부작이다. 낯선 북유럽의 매력을 후다닥 몰아 보고 곧 공개될 시즌2를 기다려 보자. 우리나라 사람들은 ‘슬로우’보단 몰아치는 걸 좋아하니 남은 회사 생활도 노르웨이 피디처럼 살긴 힘들 것 같다.

박상혁 씨제이이엔엠 예능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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