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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단순히 악뮤의 천재성에 감탄하기 위해 이 글을 썼을 리 없다

등록 2021-02-27 05:59수정 2021-02-28 11:08

[이재익의 노래로 보는 세상]
와이지엔터테인먼트 공식 누리집
와이지엔터테인먼트 공식 누리집

낭중지추라는 말을 아는지. 주머니 속의 송곳이 결국 뚫고 비어져 나오듯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가려진 곳에 있더라도 언젠가는 눈에 띄기 마련이란 뜻이다. 우사인 볼트는 결국 스프린터가 되었을 테고, 손정의 회장이나 워런 버핏 같은 사람은 아무리 가난하게 태어났다 해도 부자가 되었을 것 같다. 원빈은 아무리 촌스럽게 하고 다녀도 결국 배우로 캐스팅되지 않았을까? 가요계의 낭중지추는 누가 있을까? 필자는 첫손가락에 ‘악뮤’(악동뮤지션)를 꼽는다.

다들 알다시피 악뮤는 친남매로 이루어진 혼성 듀오다. 2012년 <에스비에스> 경연 프로그램 <케이팝 스타>에 나와 처음 얼굴을 알린 뒤 수많은 히트곡을 발표했다. 벌써 8년째 활동을 하다 보니 나이를 꽤 먹었겠다 싶은데 둘 다 ‘심하게’ 어린 나이에 데뷔한 탓에 아직 20대다. 작곡과 서브 보컬을 담당하는 오빠 이찬혁은 1996년생, 메인 보컬 이수현은 1999년생.

남매는 의정부에 있는 반지하 방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훗날 그들의 노래 ‘다이노소어’(DINOSAUR)에서도 나오는데 집에 쥐가 돌아다녔을 정도라고 하니 얼마나 가난했는지 짐작이 간다. 1980년대도 아니고 2000년대에 말이다.

‘나의 옛날 동네 반지하 빌라엔/ 네 가족 오순도순 잘살고 있었네

화장실 문 밑엔 쥐가 파놓은 구멍이/ 매일 밤 뒤척거리시던 아버지

문제없어 / 난 아무것도 몰랐거든’

부모가 몽골에 선교를 가면서 어린 남매도 함께 건너갔다. 울란바토르에서 학교에 다녔는데 그마저도 가정형편이 너무 어려워져 학교를 그만두고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오빠 이찬혁은 사춘기까지 겹쳐 부모와도 사이가 멀어졌다. 2011년경의 상황이다. 그리고 이듬해인 2012년 열일곱, 열네살 남매는 ‘악동뮤지션’이라는 팀을 결성해 <케이팝 스타>에 참가해 결국 우승을 하고 이후 전부 자작곡으로 만든 데뷔 앨범으로 단숨에 가요계를….

응? 그 짧은 시간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아무 일도 없었다. 갑자기 로또에 당첨됐다거나 키다리 아저씨가 나타나 음악학원에 보내주는 동화 같은 일도 없었다. 학교도 못 다닐 정도로 가난한 환경은 변한 게 없었지만 그들은 그냥 믿어지지 않는 재능을 타고난 거다. 앞에서 말하지 않았나. 낭중지추라고. 물론 노력도 했겠지만, 부단한 노력으로 오랜 세월을 견뎌냈다는 식의 표현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단순히 악뮤의 천재성에 감탄하기 위해 이 글을 썼을 리 없다. 필자는 천재는 아니지만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니다! 오늘 악뮤를 소개하는 이유는 존재에 대한 성찰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시대의 풍경은 경사면처럼 바뀌는 것이 아니라 계단처럼 바뀐다. 때로는 물적 토대의 변화로, 때로는 시민혁명으로, 때로는 전쟁으로, 때로는 바이러스에 의해 한 시대는 종언을 고하고 또 다른 시대를 맞이한다. 그때마다 모든 존재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는데 지금 우리는 화폐의 가치부터 가족의 형태까지 전방위적으로 존재의 의미가 바뀌는 장관을 목도하고 있다. 1990년대 후반 아이엠에프(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이후 이 정도의 전면적이고 급진적인 변화는 처음이다.

천재들은 공통으로 존재에 대한 남다른 성찰이 가능하다. 뉴턴은 미적분과 만유인력으로, 니체는 사유로, 셰익스피어는 글로써 존재를 성찰하고 그 짜릿한 결과를 천재가 아닌 우리에게 선물해주었다. 악뮤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의 노래 가사는 존재의 근원을 순진무구하게 파고든다. 이후 19살 소년과 16살 소녀가 전곡을 직접 작곡하고 부른 데뷔 앨범에 실린 ‘인공 잔디’의 노랫말을 잠깐 보자.

‘나에게는 해도 물도 필요하지 않아/ 그런 거 없이도 배부르게 살 수 있으니까

나에게는 시들 걱정 필요하지 않아/ 밟히고 뭉개져도 내 색을 잃지 않으니까

(중략)

하지만 내가 행복하지 못했던 이유는 유 노 와이(You know why?)

나도 숨 쉬고 싶어/ 비를 삼키고 뿌리를 내고 싶어

정말 잔디처럼’

그 뒤로 악뮤가 발표한 수많은 노래는 포크부터 발라드, 트로피컬 하우스 등 변화무쌍하게 장르를 넘나들었고 그에 걸맞게 노랫말도 달라졌다. 사랑을 노래하기도 하고, 말장난 같은 가사도 있다. 앞서 말한 ‘존재에 대한 순진무구한 성찰’을 담은 노래도 꾸준히 이어졌다. 오직 악뮤만이 선보일 수 있는 기발한 노래 ‘사람들이 움직이는 게’를 들어봐도 그렇다. 제목이 곧 내용인 이 곡은 보통 사람들이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치는 일상의 순간이 천재의 손길을 통해 음악으로 변하는 연금술을 보여준다. 이 노래를 듣고 난 다음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면 뭔가 달라 보이고 살아 있음에 감사한 마음마저 들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지금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는 내 손가락도 참 신기하네? 피아노를 치면 글자들이 만들어져!

악뮤의 음악은 딱 인간의 체온만큼 따뜻하다. 잘난 척하지 않으면서도 우리를 깨우치고,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감탄을 자아낸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격변의 시대에 이만한 위로는 찾아보기 힘들다. 게다가 반짝하는 천재가 아니라 꾸준하고 성실한 천재라니 얼마나 다행인가.

에스비에스 라디오 피디·<시사특공대>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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