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어간다’는 표현이 있다. ‘숟가락을 얹는다’는 말도 있고. 기세가 좋은 누군가에게 슬쩍 기대 덕을 보려는 사람을 힐난하는 말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브레이브걸스와의 인연을 이야기한다면 욕먹기에 십상이다. 최고 전성기를 보내고 있는 브레이브걸스에게 어떻게든 묻어가려고, 숟가락을 얹으려고 한다며. 하지만 오늘 칼럼을 끝까지 읽어보면 독자님들도 인정해주시리라 믿는다. 필자에게 브레이브걸스와의 추억담을 꺼낼 자격이 있음을.
에헴~. 때는 긴 장마가 끝나고 가을바람이 조금씩 일던 어느 날이었다. 필자가 진행하는 <에스비에스>(SBS) 라디오 <시사특공대>는 아주 가끔 가수들이 출연해 라이브 무대를 선보이는데, 2020년 9월13일 방송 출연자가 브레이브걸스였다. 데뷔한 지 10년이 되도록 뜨지 못했지만 한번도 포기하지 않은 집념의 걸그룹. 멤버 교체도 많았고 결성 당시 함께 활동하던 걸그룹들은 모두 가요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는데도 이름처럼 용감하게 버티고 있던 그들이었다. 매니저에게 새로 나온 노래를 건네받고 별생각 없이 들어봤는데, 어라? 노래가 왜 이렇게 좋아? 나만 좋은가? 같이 일하는 작가들도 같은 반응이어서 섭외를 결정하고 브레이브걸스를 초대했다.
감동받았다. 그들의 모습에서는 밥벌이의 숭고한 정신이 느껴졌다. 이를테면, 박봉에도 꿋꿋이 범인을 쫓는 형사나 실연의 아픔을 숨기고 사람들을 웃겨주는 개그맨, 혹은 태풍으로 작살난 논밭을 묵묵히 살려내는 농부를 볼 때 느끼는 그런 감동 말이다. 그들은 화려한 조명이 있는 무대도 아니고 청취율 팍팍 나오는 <컬투쇼> 같은 프로그램도 아닌, 시사 프로그램 일요일 방송에 나와서 최선을 다했다.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왔다가,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 진 그 위에서 어디에다 무릎을 꿇어야 할지 고민하는, 이육사의 시 ‘절정’의 주인공마냥! 그들은 버틸 만큼 버티고 언제 해체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에서도 가수로서 해야 할 몫을 할 뿐이었다. 관객도 없는 스튜디오에서 카메라를 보며 노래하고 춤추고, 썰렁한 내 개그에 한껏 웃어주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방송 내내 나는 진심으로 기도했다.
‘이 용감한 소녀들에게 제발 기적이 일어나기를.’
몇달 뒤, 2021년으로 해가 넘어가자 기적이 일어났다. 내 기도나 그날의 출연과는 상관없이, 우리나라를 지켜주는 군인 아저씨들이 그들을 지켜낸 것이다. 이 얼마나 잘 어울리는 조합인가. 용감한 군인들과 용감한 소녀들이라니! 차트 역주행을 시작한 그들은 무려 아이유와 블랙핑크 로제를 누르고 방송차트 1위를 차지했다. 10년 만에 솟아오른 그들의 비상을 보며 나는 남다른 감격에 눈물지었다. 물론 나이가 드니 눈물이 많아진 탓도 있다.
동트기 직전이 가장 어두운 것처럼 브레이브걸스에게 가장 암울했던 시기였을 2020년 활동은 어땠을까? 나무위키의 기록을 보자.
‘멤버 민영이 <트로트 전국체전> 예선에 참여했으나 본선에는 진출하지 못했다.’
‘8월14일, 3년 만에 디지털 싱글 앨범 <운전만 해>로 컴백하여 9월13일 <이재익의 시사특공대>(에스비에스 러브 에프엠)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2020년의 스케줄은 이 두개가 전부다. 실화냐. 그 뒤로는 민망한 내용이 이어지는데, 멤버들은 이제는 더는 안 되겠다며 그룹을 해체하려고 했단다. 그 상황에서 바로 ‘롤린’의 신화가 시작되고 여명이 비치기 시작한 것이다.
동트기 직전의 캄캄한 어둠 속에서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영광이다. 오랜만에 유튜브에서 그때 방송 영상을 다시 찾아보고 또 뭉클해졌다. 이른 갱년기일까? 어쨌든 이 정도 인연이라면 브레이브걸스에 좀 묻어가도 되겠지? 숟가락 얹을 자격이 있으려나?
거창한 삶의 교훈을 늘어놓으려고 쓴 글은 아니다. 다만 브레이브걸스의 성공에서 유튜브 알고리즘은 슬램덩크의 왼손처럼 그저 거들 뿐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앞에서 기적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사실 기적도 아니다. 가뭄에도 태풍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농사지은 농부가 풍요로운 수확을 거둔 것이 기적인가. 밤낮으로 범인을 쫓아다니던 형사가 결국 범인 검거에 성공한 스토리다. 일요일 시사 프로그램 출연도 마다치 않고, 뱃길로 10시간 넘게 걸리는 백령도 군부대까지 가서 위문공연(위문이라는 표현이 불쾌하다는 사람들도 있는데 사전부터 찾아보시길)을 펼친 가수가 뒤늦게 빛을 봤다는, 당연한 기승전결이다. 브레이브걸스는 이런 흐뭇한 결말을 맞을 재능도 자격도 있다.
노래 이야기를 너무 안 했나? 원곡 ‘롤린’ 말고 2018년에 다시 내놓은 버전이 내 취향엔 더 맞더라. 원래도 여름 노래인 원곡에 트로피컬 하우스 색채를 더하고 색소폰을 얹었는데 아주 난리 난다. 앞에서 잠깐 나온 ‘운전만 해’도 강력 추천. 작년까지 대유행했던 시티팝인데, 당장 차를 몰고 저녁 어스름이 깔리는 도로를 느긋하게 달리고 싶은 기분이 든다.
요즘 연예계에서 가장 바쁜 몸이 된 그들에게 얄팍한 인연을 빌미로 출연을 요청할 생각은 없다. 나중에 조금 한가해지면 다시 초대하도록 하고. 혹여 피디와 디제이의 인연으로 만날지도 모르겠다. 세상사 롤링 롤링 돌고 도는 거니까.
에스비에스 라디오 피디·<시사특공대> 진행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