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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1달러 들고 가출한 청춘도 살만했던 세상의 찬가, 지금은?

등록 2021-04-23 18:13수정 2021-04-24 02:32

[이재익의 노래로 보는 세상] 로드 스튜어트 ‘영턱스’
공식 누리집 갈무리
공식 누리집 갈무리

로드 스튜어트는 서구권에 견줘 우리나라에서 평가가 박한 아티스트 중 한명이다. 영미권에서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고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도 이름을 남기고 빌보드 차트 1위 곡도 여럿 낳은 전설로 추앙받지만, 우리나라에는 ‘세일링’이라는 올드팝을 허스키한 목소리로 부른 할아버지 정도로 알고 있는 분들이 많다. 태진아와 송대관이 티격태격 라이벌 구도를 형성한 것처럼 그는 엘턴 존과 라이벌로 활동했으며, 결혼을 무려 여덟번이나 한 파란만장한 사생활로도 유명하다.

오늘 주인공은 그의 인기곡 중 하나인 ‘영턱스’다. 40년 전인 1981년에 발표한 이 노래는 한없이 신나고 희망찬 멜로디와 잘 어울리는 노랫말을 갖고 있다. 요즘은 이런 식으로 가사를 쓰지 않지만 예전에는 기승전결을 갖춘 이야기를 노래 한곡에 담는 경우가 곧잘 있었다. 의역해서 소설처럼 가사를 적어본다. 피 끓는 청춘, 빌리와 패티가 주인공이다.

‘빌리는 집을 떠났다. 주머니에는 1달러밖에 없었지만 머릿속엔 꿈이 가득했다. 그는 종종 말하곤 했다. 뭘 어떻게 하더라도 지금보다는 나을 거라고. 패티는 가방을 꾸리고 엄마에게 메모를 남겼다. 그렁그렁 눈물이 고인 채로 어린 동생에게 입을 맞추고 집을 나온 그녀는 17살이었다.

밤을 지새우면서 차를 몰고 떠난 그들은 서로를 꼭 안아주었다. 아직은 두렵지 않으니 이 순간을 좀 더 즐기자고 생각했다. 시간이란 우물쭈물하면 도둑맞는 것. 한줌 가득 쥐고 있다가도 모래처럼 사라져버리니까. 그들은 방 두개짜리 아파트를 얻어 밤마다 신나게 놀고 서로의 품에서 행복을 찾았다.’

여기까지가 기와 승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이 철없는 가출 소년과 소녀는 그 뒤에 어떻게 되었을까? 노래는 트럭 운전사가 된 빌리가 부모님께 보낸 편지 내용으로 이어진다. 허락도 받지 않고 가출해서 죄송하다고, 패티는 무려 4㎏이 넘는 건강한 남자아기를 출산했다고. 그리고 신나는 후렴구가 이어진다.

‘청춘이여, 오늘 밤 마음껏 자유를 만끽하라. 시간은 너희 편이니까. 어른들이 너희를 주저앉히고 휘두르고 생각을 바꾸도록 놔두지 마.’

‘영턱스’ 뮤직비디오 갈무리
‘영턱스’ 뮤직비디오 갈무리

얼마 전에 어떤 뉴스를 보는데 이 노래가 떠올랐다. 지독한 가난에 시달리던 20대 부부의 비극을 다룬 뉴스였다. 지체장애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 아내는 보증금 사기로 구속되고, 남편은 한살 터울의 갓난아기 둘을 데리고 모텔 방을 전전하다가 태어난 지 두달밖에 되지 않은 둘째 아기를 던져 혼수상태에 빠뜨렸다. 하루 한끼로 버티며 모텔을 전전하던 네 가족은 결국 구치소와 보육시설, 병원으로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아이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아빠로서 아기를 던진 행위는 용서받기 힘들다. 그러나 그 전에 이 가족이 이토록 위태로운 상황에 몰려 점점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데도 구해내지 못한 우리 사회의 책임은 없을까? 아마 이 글에 이런 식의 댓글이 달릴지도 모르겠다. ‘능력이 없으면 아이를 낳지 말라’ 혹은 ‘막일이라도 해서 아기들을 먹여 살렸어야 하니 전부 부모 책임이다’ 등등.

나는 그런 식의 책망에 동의할 수 없다. 일단 태어난 생명은 누가 나서서라도 지켜내야 한다. 부모가 지켜주면 제일 좋겠지만 그럴 수 없다면 국가가 나서서 지켜내야 한다. 부모의 악마 같은 본성으로 인한 아동학대가 아니라 가난해서 아기를 키울 수 없는 상황만큼은 분명히 복지 시스템으로 막을 수 있다.

공식 누리집 갈무리
공식 누리집 갈무리

이번 재보궐선거 이후 갑자기 청년에 대한 정치권의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여야 할 것 없이 자신들이 청년들의 희망을 책임질 세력임을 자부했고, 최근 국무회의에서 대통령은 청년 세대의 어려움을 나눌 특단의 대책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 바로 그때 인천의 어느 모텔에서는 어린 부부가 하루 한끼만 먹어가며 아기들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네 꿈을 펼쳐라 등의 구호는 경제성장률이 10%에 육박하고 기업들이 대학생들을 모셔가려고 학교에 찾아와 취업을 부탁하던 시절에나 통하던 소리다. 부동산 가격은 미친 듯이 치솟고 빈부격차는 점점 더 벌어지고 취업난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이 시대에 시대착오적인 각자도생을 강요한 결과가 전세계에서 가장 낮은 출생률이고 그나마 태어난 아기들도 지켜주지 못하는 현실이다.

로드 스튜어트의 노래 ‘영턱스’의 희망찬 노랫말은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렸다. 가요든 팝이든 그런 식의 한가로운 낙관주의는 시대착오적이라며 외면당한다. 주머니에 1달러만 넣고 집을 나온 청춘들이 일자리를 찾고 집을 구하고 아기를 낳고 살 수 있는 사회는 다시 올 수 있을까? 자꾸 풀리기만 한다는 돈은 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늘어만 가는 세금은 어디에 쓰는 것일까? 다른 건 몰라도 비싼 집에 매기는 종부세만큼은 일반세가 아니라 목적세로 바꾸어 빈곤에 내몰린 아이들을 구하는 일에만 쓰면 어떨까?

이상, 희망과 기쁨이 넘실대는 노래를 듣고 끄적거려본 슬픔과 분노의 넋두리였다.

이재익 ㅣ 에스비에스 라디오 피디·<시사특공대>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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