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3회 아카데미 시싱식 레드카펫에 단아한 감색 드레스를 입고 참석한 배우 윤여정. 연합뉴스
윤여정의 솔직하고 재치 있는 수상 소감이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세계인의 귀를 사로잡았다면, 단아하면서도 기품 있는 그의 짙은 감색 드레스는 세계인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윤여정의 시상식 패션을 담당한 스타일리스트가 최근 미국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전한 일화는, 윤여정이 패션에도 분명한 자기 원칙을 고수하는 이라는 걸 보여준다.
스타일리스트 앨빈 고는 지난 26일(현지시각) 미국 <뉴욕포스트>와 한 인터뷰에서 “(명품 브랜드) 사람들은 윤여정에게 (자신의) 브랜드를 입히기 위해 돈을 지불하고 싶어했다”며 “그러나 윤여정은 그 모든 것에 관심이 없었다”고 밝혔다. 그는 또 “시상식을 준비할 때 전세계에서 250벌이 넘는 초고가 의상”이 윤여정 앞으로 배달되었지만 “윤여정은 ‘눈에 띄지 않아도 된다. 큰 보석도 필요 없고, 화려한 옷도 필요 없다. 난 나답고 싶다'고 했다”고 덧붙였다.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협찬 의상보다 평소 입었던 단아한 풍의 의상을 고집했다는 얘기다. 공짜나 협찬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지인들의 얘기가 맞아떨어지는 대목이다.
싱가포르 출신으로 현재 홍콩에서 활동하는 앨빈 고는 그동안 엠마 왓슨, 틸다 스윈턴, 우마 서먼, 마고 로비 등 유명 할리우드 스타들의 의상, 메이크업 등 스타일을 담당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앨빈 고는 이어 “유명인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없다”며 “그는 50년 이상 이 업계에 종사했다. 윤여정 같은 경력의 누군가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고 했다. 또 “윤여정은 공주님 모습을 원치 않았다. 나이에 맞게 보이기를 원했다”며 “그는 매우 절제된 여성”이라고 평가했다.
결국 시상식 당일 윤여정이 선택한 옷은 이름난 명품 브랜드가 아니라 이집트 출신의 디자이너 마마르 할림의 의상이었다. 두바이를 주 무대로 활동하는 것으로 알려진 마마르 할림은 국내에선 생소한 디자이너이다. 그의 드레스 가격은 대략 100만~300만원대라고 알려져 있다. 윤여정의 ‘선택’을 받은 드레스는 짙은 푸른빛이 돌면서 화려한 주름이 없는 단아한 스타일인데, 은색 팔찌 등의 액세서리와 조화를 이루면서 그의 단아함을 드러냈다.
패션에 대한 윤여정의 남다른 안목은 국내 정상급 스타일리스트들이 그와 작업하고 싶게 만드는 이유다. 김성일 스타일리스트는 한마디로 정의한다. “내추럴 엘레강스다. 인공적이지 않으면서 우아한데, 사치스럽지 않은 패션이다.”
지난 2017년 <한겨레> 섹션 ESC에서 다룬 ‘윤여정의 패션’에선 여러 스타일리스트들이 윤여정의 패션에 대해 한마디씩 했다. 채한석 스타일리스트는 “브랜드의 진정성을 알고 패션을 즐길 줄 안다는 의미에서 ‘럭셔리’다. 좋은 옷들을 다 입어본, 패션 감각이 뛰어난 사람들은 결국 가장 기본적인 스타일로 돌아간다. 윤여정은 클래식하고 평범해 보일 수 있지만 그런 면에서 가장 스타일리시하다”고 했다.
윤여정이 2017년 <한겨레> 섹션 ESC 인터뷰 당시 입었었던 옷. <한겨레> 자료 사진
간호섭 홍익대 교수(미술학과)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혁명과 진화의 여정이라고 말하고 싶다”며 “윤여정의 패션은 그의 인생 여정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 간 교수는 “때로는 나이를 넘나드는 파격적인 패션으로 혁명적인 스타일을 추구하지만, 때로는 그만의 농익은 패션으로 스타일의 진화를 보여준다. 영화 <화녀>의 주인공도 그고, 영화 <하녀>의 집사도 그인 것처럼 말이다”라고 했다. 결국 옷을 고르는 안목과 작품을 고르는 식견은 통하기 마련인가 보다. 그런 점에서 윤여정은 자신을 잘 아는 사람이다. 이미 캐나다 촬영분을 마친 것으로 알려진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애플티브이(TV)플러스 드라마 <파친코> 관련 행사에선 그가 어떤 의상을 입고 나올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