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나빌레라>에서 70대 노인 심덕출을 연기하는 최인형(왼쪽)과 조형균을 지난달 21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만났다. 뮤지컬 속 덕출은 노인 연기를 하면서 발레를 하고 노래까지 불러야 해 웬만한 내공이 아니고선 소화하기 힘들다. 김명진 기자
“드라마 <나빌레라>가 뮤지컬로 만들어진다!” 오는 14~30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 토월극장에서 열리는 창작뮤지컬 <나빌레라>는 이 한 문장으로 설명이 끝난다. 지난 3~4월 <티브이엔>(tvN)에서 방영한, 원작이 같은 드라마가 화제를 모은 덕분이다. 알츠하이머병을 앓는 심덕출(박인환)이 이채록(송강)의 도움으로 어릴 적 꿈인 발레에 도전한다. “아직 늦지 않았다. 당신은 날아오를 수 있다”는 ‘좋은 어른’ 덕출의 이야기가 감동을 줬다. 2019년 초연에 이어 재연하는 뮤지컬에서 덕출은 어떻게 표현될까?
지난달 21일 예술의전당의 한 카페에서 마주한 두 덕출의 표정이 어째 복잡미묘하다. “박인환 선생님 연기가 너무 화제니까 고민이 좀 되죠. 드라마를 일부러 찾아보지는 않았어요. 선생님 연기를 따라갈 수 없는데 드라마를 열심히 봤다가 나도 모르게 흉내 내게 될까봐.” 2019년 초연 때부터 진선규와 함께 원조 덕출을 맡은 최인형이 말했다.
재연에서는 진선규가 빠진 자리에 조형균이 들어왔다. 조형균은 덕출을 연기하는 데 있어 “이질감”이 가장 큰 숙제였다고 한다. 초연 때는 주로 뮤지컬 팬들이 극장을 찾았지만, 재연 때는 드라마를 본 시청자들이 대거 유입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드라마에는 실제 노인 배우가 출연해 자연스러웠지만, 뮤지컬에선 젊은 배우가 노인 분장을 하잖아요. 관객 앞에서 얼마나 자연스럽게 동화될 수 있을까, 그 접점을 찾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드라마 속 박인환은 어려운 발레 동작 장면에서 대역을 썼고, 마지막 무대 장면은 컴퓨터그래픽까지 활용했다. 하지만 뮤지컬 무대는 생방송이다. 관객 앞에서 발레를 하고 알츠하이머병 연기도 하면서 노래까지 불러야 한다. 웬만한 내공이 아니고선 소화하기 힘들다. 두 배우는 덕출 역 제안을 받았을 때 “내 연기가 그 정도인가” 하고 기분이 좋으면서도 막상 걱정도 됐단다.
재연에는 초연보다 발레 장면이 더 많이 들어간다. 서울예술단원인 최인형은 고등학교 1학년 때 발레, 현대무용 등을 배웠지만, 조형균은 두달 전 바를 잡는 기초부터 시작했다. “연습실에 처음 간 날, 진짜 덕출이 발레 클래스에 처음 간 것 같았어요. 다른 무용수를 보며 뒤에서 박수만 치고 있는데, 옆에 있던 인형이 형이 그랬어요. ‘너 지금 덕출 같아.’” 발레는 처음이어도 학창 시절 비보이를 했을 정도로 몸이 유연하기에 금세 적응할 수 있었다.
발레 공연 경험이 있는 최인형은 오히려 “발레보다 눈물을 참는 게 힘들다”고 했다. <나빌레라>에선 발레를 배우는 덕출의 도전과 함께 그런 덕출을 이해하지 못하는 가족과의 갈등과 화해, 덕출과 채록의 성장 등 다양한 관계에서 빚어지는 감정선이 도드라진다. “우리 모두 누군가의 아들이잖아요. 감정이 이입되는 순간들이 있어요. 거기서 눈물을 흘리면 그 인물에서 빠져나와 현실의 내가 되어버리거든요. 혼자 공원에서 김밥을 먹는 대목, 성산(아들)이 발레를 그만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대목 등 위험한 구간이 두세 군데 있어서 어떻게든 눈물을 참으려고 노력합니다.”
<나빌레라>가 웹툰, 드라마, 뮤지컬 모두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건 평범하지만 소중한 메시지 때문이다. 보통은 덕출을 보며 “늦기 전에 꿈에 도전하자”는 메시지를 떠올리지만, 두 사람은 “가족의 소중함이야말로 진짜 메시지”라고 입을 모은다. “우리 공연을 보고 나서 부모님 이야기만이라도 잘 들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연습하면서 저도 그게 목표가 됐어요.”(최인형) “<나빌레라>에서 덕출 대사 중 ‘나한테 가장 없는 게 시간’이라는 말을 가장 좋아해요. 시간이 없으니까 꿈을 이루자, 그런 거 말고, 단절되는 시대에 서로 조금이라도 더 소통하려는 노력, 가족과 전화 한통이라도 더 하려는 시간을 갖는 게 필요한 것 같아요.”(조형균)
같은 덕출이지만 둘의 표현은 조금씩 다르다. 최인형의 덕출이 차분하고 묵직하고 편안하다면, 조형균의 덕출은 위트가 넘친다. “그래서 연습할 때 형균표 덕출을 우리끼리 미국 할아버지라고 불러요. 하하하.”(최인형) 최인형의 덕출은 발레를 보는 맛이 좋다. 재연에서 발레 장면이 늘어난 만큼 그의 연기가 초연 때보다 더 빛난다. 조형균의 덕출은 뛰어난 노래 실력이 제대로 빛을 발한다. 그리고 기본 발레 동작을 배우는 사실감이 조금 더 산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웹툰에는 특정 작품이 언급되지 않지만, 드라마에서 덕출은 어릴 때 러시아에서 <백조의 호수>를 보고 발레에 스며든다. 조형균은 국내 배우가 출연한 <오페라의 유령> 초연을 보고 뮤지컬에 관심을 갖게 됐고, 최인형은 중학교 때 예술의전당에서 뮤지컬 <아가씨와 건달들>을 보고, 고등학교 때 친구 따라 발레를 하면서 예술단에 관심을 갖게 됐다.
조형균은 뮤지컬에서, 최인형은 서울예술단에서 자신의 자리를 확고히 다지고 있다. 조형균은 “20대 후반에서 30대로 넘어갈 때 ‘이 길이 맞을까’ 고민하며 그만두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지만 진선규 등 여러 동료의 도움으로 버텨냈다”고 한다. 최인형은 서울예술단 안에서 뛰어난 재능으로 유명했다. 그런데도 자만하지 않고 차근차근 최선을 다해 한발짝씩 내디뎠다.
그들에겐 함께하는 동료들이 덕출이었고 채록이었다. “채록과 덕출처럼 <나빌레라>를 보면서 진정한 동료가 무엇인지, 좋은 어른이란 무엇인지 생각하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는 두 사람은 14일 첫 공연을 위해 오늘도 노인이 된다.
남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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