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최백호가 지난 3일 서울 여의도 한 커피숍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진짜 최백호는 예술가라는 말로도 부족하다”, “나이 70에 저런 미친 가창력으로 노래를 완성하신 최백호씨가 가장 괴물인 듯.” 얼마 전 종영한 제이티비시(JTBC) 드라마 <괴물> 오리지널 사운드트랙 ‘더 나이트’(The Night)가 유튜브에 공개된 뒤 달린 댓글이다. 최백호의 노래는 지금이 르네상스다. 1976년 노래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로 데뷔한 그는 시종일관 ‘지금’ 시대의 감정을 노래해왔다. 가수로서 오랜 불황의 시기를 지낸 뒤 1995년 쓴 ‘낭만에 대하여’가 크게 히트하며 그는 ‘낭만 가객’으로 불리게 된다. 잃어버린 것을 애도하던 그는 2000년대 이후 젊고 ‘힙’한 아티스트들이 가장 함께하고 싶어 하는 ‘큰 바위 얼굴’이 되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노래로 만들며, 가사를 먼저 써놓고 멜로디를 붙이는 가수, 그래서 거짓을 노래할 수 없다는 이 가수는 말한다. “구십엔 지금보다 훨씬 더 깊은 노래를 할 수 있겠죠.” -편집자 주
최백호는 이상한 가수다. 가수들은 시간이 지나면 목소리를 잃어버린다. 올해 일흔한살, 최백호 보컬의 르네상스는 최고점에 다다랐다. 젊었을 때보다 폐활량이 커지고 기술적으로 진화했으며 우수는 바다 끝에 다다른다. 요즘 부르는 ‘낭만에 대하여’가 1995년 발표된 노래보다 두세 키 높다는 걸 알면 누구든 완전히 미쳤다고 생각할 것이다. 비정제된 힘, 짱짱하게 울리는 타격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전성기가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전성기에 가수들은 굉장히 바빠지잖아요. 연습도 많이 하고 실제 공연처럼 목을 많이 써요. 소리도 냉장고에 있는 음식처럼 많이 꺼내면 빨리 없어져요. 저는 젊을 때 연습도 가사 느낌만 익히는 식으로 천천히 했기 때문에 좀더 지탱한 게 아닐까. 가수는 음색이 중요한데 저는 시간이 지나면서 만들어졌어요. 성대가 완전히 굳은 지금 고음이 더 잘 나오는 원인은 모르겠어요.”
노래를 잘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목젖이 여섯개나 되는 듯 고함을 내지르는 걸까? 그럼 에릭 클랩턴이나 유재하나 존 레넌은 노래를 못 부른다는 말일까? 보컬 재능이 있는 가수들은 가창의 역사 속에서 그를 참조할 것이다.
5월의 오후 2시, 호텔 커피숍에 먼저 앉아 그를 기다리는데 과음한 뒤 입안이 마르는 느낌이 들었다. 옆에서 몇몇이 웅성거리는 커피숍에서 내밀한 이야기를 해야 하다니. 그는 곧 식은땀이 마른 듯 지쳐 보이는 얼굴로 다가와 서가를 배경으로 앉았다. 그리고 “오늘 몸이 조금 아파요” 하고 말했다. 광채보다 짙은 그림자가 먼저 들어오는 얼굴로. 재작년에 크게 앓았던 여파일까? 광량이 많은 시간에 그의 모래빛 머리카락이 반짝거렸다. 몸이 안 좋다는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하나, 우물쭈물하다 부드러운 감색 재킷과 티셔츠, 붙는 청바지와 스니커즈의 감도 높은 착장을 보니 기분이 달라졌다. 스니커즈 양말 위에 드러난 발목이 스타일리시한 유머 같았다. 즉, 그의 나이와 무드 사이에는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었다.
“20대 때부터 이렇게 입었어요. 펑퍼짐하지 않고 타이트한 바지 좋아해요. 이 재킷은 11만원 주고 샀어요.”
그는 바젤이라는 저렴한 브랜드를 좋아한다면서 재킷 목 부위의 라벨을 들여다보곤, 다시 티셔츠를 손가락으로 집었다.
“이건 풀앤베어. 굉장히 싼 거예요. 비싼 건 못 입어요. 어릴 때부터 가난하게 살아서. 신발은 많아요. 이건 아디다스예요. 이마트에서 한번 세일할 때 2만 얼마에 샀는데 그때 몇개 안 산 게 후회돼요. 한 5, 6년 신었는데 너무 좋아요.”
한 사람의 서정적인 일대기에는 딱히 이름 붙일 말이 없다. 그러나 45년 전, 10대 소녀들이 부끄러워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친구 방 구석에서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를 불렀을 때, 라디오 다이얼조차 만질 수 없었던 세대의 남자들이 감상적으로 ‘애비’를 노래할 때, 스물두살의 ‘입영전야’에 담배 연기 속에서 소주잔을 원샷할 때 최백호 노래는 시절의 감정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시간을 건너 도달하는 어떤 합의, 한국인과 최백호 노래는 그렇게 서로 마음을 증명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는 스탠드 마이크로 노래한다. “손에 마이크 드는 게 어색해서.” 그리고 마이크를 휘장처럼 휘감는 퍼포머도 아니라서. 눈을 감은 채 두 손을 늘어뜨리면 달려갈 곳도 숨을 곳도 없다. 그가 음절 하나하나를 돌보듯 터치할 때 어느새 가슴께로 올라온 두 손은 몸의 언어를 보탠다. 그리고 관객들이 목을 길게 빼고 그의 노래를 들을 때 모든 음정을 빠뜨리지 않겠다는 상반신의 표정. 처음 듣고 몇십년이 지나도록 그 순간을 얼려 두고두고 꺼내보는 노래가 얼마나 될까?
최백호의 ‘오랜 벗’을 좋아하는 2002년생 청년이 나에게 말했다.
“비현실적인 이상을 노래하는 게 아니라 지금의 현실을 노래하고 있어요. 가사나 코드가 상업적이었다면 과거와 지금 노래가 달랐을 텐데 자기 노래를 유지하고 성장시키려는 모습이 노래를 정말 사랑한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최백호는 송창식을 동경했다. 부산 라이브 클럽에서 노래를 부르던 20대에 그는 ‘딩동댕 지난 여름’ 같은 송창식 노래를 불렀다. 가끔 이장희 노래도 불렀다.
“송창식 선배님은 기존의 대중음악을 박차고 나온 사람이었어요. 군사정권 시절에 가슴속이 응어리진 저희에게 절대적이었죠. 누가 이렇게 쓴 적이 있어요. ‘최백호와 누구누구는 송창식을 벗어날 수 없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냥 하는 얘기로 다음 앨범을 타이틀은 ‘송창식 벗어나기’로 해볼까….”
그러나 최백호 역시 기존 대중음악의 공식에 반발하지도 수긍하지도 않으면서 자기만의 사조를 만들었다. 1977년, <문화방송>(MBC) ‘10대 가수 가요제’에서 선우혜경과 함께 신인상을 받은 최백호는 당대 가수들이 순진한 듯 발랄하게 노래할 때 무대를 아랑곳하지 않는 ‘와이셔츠’에 조끼 차림으로 등장했다. 아무 광휘도 안 느끼는 듯 떼꾼한 눈, 팬 볼, 이마를 가로로 덮은 머리. 그리고 통기타. 그의 손톱이 화려할 것 없는 튜닝으로 쇠줄 기타를 연주할 때 다른 손가락 사이에서 나는 음들이 스프레이처럼 뿌려지면 텅 빈 마분지 같은 목소리는 눈길을 걸으며 옛일을 잊겠다고 노래한다. 마지막 소절 “가을엔 떠나지 말아요. 차라리 하얀 겨울에 떠나요”에선 원곡과 달리 “가을엔, 가을엔, 가을엔” 하고 세번 반복하는 담력까지 보여주면서.
“현실감이 안 들었어요. 기타를 어떻게 치는지 노래를 어떻게 하는지 전혀 모르겠는데 우리 누님이 딱 올라와 꽃다발 주실 때 정신이 번쩍 들었죠. 그날은 참 안 잊혀요. 하숙할 때였는데, 정장 입으라고 해서 엠비시에 있는 검은색 정장을 입었는데, 그 옷에 기타 치면 안 어울리겠다고 해서 셔츠만 입고 나갔더니 그것도 이상하다고 누가 조끼를 빌려줬어요. 하루하루, 현실적으로 안 느껴졌어요. 무명 가수로 명동에서 쭉 노래하다가 내 앨범 나오고 일주일 만인가, 밤늦게 일하고 나오는데 레코드점에서 내 노래가 나오는 거예요. 레코드점 아저씨가 한달간 계속 리와인드시켰어요. 그 순간이 참 안 잊혀요.”
그러나 첫번째 노래의 보상은 부와 스타덤으로 가는 열쇠와 거리가 있었다.
“첫 노래가 알려지고 난 다음부터 히트곡이 안 나왔어요. 절벽에서 누가 내 머리를 잡고 있다가 놓으면 떨어지는 기분이었어요. 그때는 노래 그만두려고 시도 많이 했어요. 미국에서도 살아보고, 부산에서도 만 2년 살고. 그런데 노래를 그만두니 아무것도 할 게 없었어요. 노래 외엔 할 줄 아는 게 없었어요.”
가수 최백호가 지난 3일 서울 여의도 한 커피숍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첫노래 알려진 뒤 히트곡 안 나왔죠
절벽서 누가 머리 잡았다 놓은 기분
노래 그만두니 할 일이 없었어요
가수로서의 불황 이후 1995년에 쓴 상실의 애도곡 ‘낭만에 대하여’는, 노래는 아무리 남성적이어도 고독하다고 귀띔하며 천공으로 치솟았다. 노래는 자주 멀리 있다. 노래가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를 할 때 노래를 구성하는 요소와 거리감이 생길 것이다. ‘낭만에 대하여’가 옛날을 불러오는 우연한 방식은 그 정서를 모르는 사람도 완전히 홀리고 말았다. 들리는 노래와 따라오는 기억 사이에 아무 연관성이 없는데 왜 슬퍼질까? 단계도 계기도 없이 허전해져선 아무나 붙잡고 울고 싶은 건 왜일까? 우리를 남겨두고 떠난 세월, 영원히 한번뿐인 것, 부끄럽거나 순진한 추억, 뿌리칠 수 없는 우울. 슬픔은 생성될 수 있다. 그러나 쓸쓸함은 형태가 없는 채 오히려 더 살아 있다고 느끼게 만든다.
“잃어버린 낭만이란, 시간. 젊은 시절의 어떤 실연의 상처마저도 지금은 아쉬우니까요.”
이것은 추억의 현재적 이해일까? 또는 작위적인 미학의 절대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요즘 티브이는 온통 관찰 카메라와 음식과 트로트의 삼위일체로 부산하지만 누군가는 요즘 노래가 석양을 마주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티브이를 보지 않는 그가 말했다.
“저는 제 이야기를 노래로 만들어요. 저희 세대 싱어송라이터들처럼. 요즘은 남이 만들잖아요. 옆에서 봐주는 대로 하니까 개성을 잃어버렸죠. 노래 만드는 방법도 달라요. 요즘은 멜로디 먼저 만들고 가사를 붙이니까 가사에 진실할 수 없죠. 저는 가사부터 써놓고 멜로디를 붙이니까 거짓말할 수 없어요.”
그는 노래가 응당 위치해야 할 최전면에 직접 쓴 가사를 배치한 다음 진실이라는 오랜 기치를 들었다. 자기 인생을 이해하는 가사를 쓴 뒤에야 페이소스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듯이. 그렇지 않으면 잘 조종된 거짓말이라는 듯이.
“어머님이 글을 쓰셨어요. 그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해요. 저는 부산에서 정말 똥통 학교를 나왔어요. 얼마나 엉터리냐 하면 문예반도 없었어요. 저는 학교도 거의 안 나갔어요. 고등학교 3학년 때, 국어 선생님이 저보고 진해에서 하는 백일장에 나가라는 거예요. 정말 깡패 학교여서 보낼 애들이 없는 거죠. 노래 가사 쓰고 곡을 쓰게 된 건 기타 치고 노래하는 게 직업이 되면서부터였어요. 그게 어느 정도 트레이닝이 됐겠죠. 그냥, 그냥 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땐 악보를 볼 줄 몰랐죠. 그래도 곡을 쓸 수 있었어요.”
그는 서울 도심의 겨울나무가 자기 모습 같다고 말했다. 시골에서 서울 올라와 정들이지 못하고 살던 자기 같다고. 지금도 사람을 잘 만나지 않는다. 간혹 배철수와 축구를 하고, 구창모와 골프를 치는 것 외에 특별히 친한 가수가 없다. 같이 앨범 작업했던 젊은 뮤지션들과도 따로 연락하지 않는다.
“신인 때 회사에서 해준 거 말고는 한번도 제 노래를 피아르해본 적이 없어요. 매니저를 둬본 적도 없어요. 제가 사람을 잘 못 믿어요. 타고난 성격인 것 같아요. 약간 까다롭다고 할까요. 돈 문제도 굉장히 철저해요. 매니저들을 한 두어번 둬봤는데 안 되겠더라고요, 도저히.”
가수 최백호가 지난 3일 서울 여의도 한 커피숍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95년 ‘낭만에 대하여’ 히트로 반전
정말 바빠진 건 육십이 넘어서였다
아흔살 돼도 얼마든지 노래할 수
그 나이 호흡으로 노래하면 되니까
황량한 코로나 시기엔 아내와 같이 있는 시간이 제일 좋다. 같이 노래하고 같이 그림 그리는 게.
“제가 재작년에 많이 아팠어요. 먼저 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심각했어요. 몸이 한 10킬로그램 빠졌어요. 지금도 반밖에 안 돌아왔어요. 그때 와이프하고 이야기를 참 많이 했어요. 40년 가까이 살면서도 우리 와이프가 나를 이렇게까지 걱정해줬구나 하는 걸 처음 알았어요. 젊었을 때 저는 아무거나 먹고 배만 부르면 됐는데 와이프는 완벽주의자예요. 식사도 세팅을 해줘야 해요. 저는 마음대로 편하게 먹어야 해서 차려지는 걸 못 참아요. 이제 익숙해졌어요. 어떤 면에서는 지금이 제 삶에서 제일 행복하고 안정적이에요.”
그가 ‘애비’를 쓴 건 딸이 다섯살 때였는데, 얼마 전 그 딸이 손녀를 낳았다. (그는 정작 딸의 결혼식 때 ‘애비’를 부르지 않았다.)
“손녀가 지금 21개월 됐는데, 딸아이의 21개월은 전혀 기억이 안 나요. 손녀는 완전히 달라서 우리 딸아이 기억이 안 나는 걸까요?”
어떤 의미론 자식을 낳아 기르는 것이 윤회의 의미 같다고 말하자 그의 눈이 반짝, 개구지게 변했다.
“인사동에 친구들 모임이 있어요. 요즘은 코로나 때문에 잘 안 모이는데, 장사익 선생님도 그때 있었어요. 그 모임에서 천국과 지옥이 있다면 어디냐? 달 뒤냐, 화성이냐, 우스갯소리 한 적이 있어요. 저는 어릴 때부터 사후 공포에 굉장히 시달렸어요. 아버님이 정치를 하시다 일찍 돌아가셨는데 지금 어디 가 계시는가. 스무살 때 어머님이 돌아가셨는데 화장하러 들어갈 때 너무 충격이 컸어요. 어느 날 깨쳤어요. 육신에서 영혼이 빠져나가면 다른 데로 흩어지지 않고 물리적으로나 화학적으로 가장 가까운 자식 몸속으로 들어가 어떤 요소를 가진다. 국어 공부 하나도 안 했던 제가 노래 가사를 쓰고 음악 공부 하나도 안 한 제가 노래를 하는 건 우리 어머님이 내 몸속에서 작용하시기 때문이라고 믿어요. 쭉 이어온 혼들의 모임이 디엔에이(DNA)로 작용한다고 생각해요.”
두려운 것은 두려움 자체. 잎은 떨어져 뿌리로 되돌아갈 것이다.
“그래도 사후의 무서움은 없어지진 않았어요. 아직 자식의 몸속에 가긴 싫죠.”
더 큰 두려움은 육신의 취약함인지도 몰랐다.
“얼마 전 투어 중에 쓰러진 적이 있었어요. 공연 전에 급하게 물을 마셨는데 그게 체한 거예요. 물도 체하더라고요. 그냥 털썩 주저앉아 정신을 잃었어요. 처음에는 숨이 콱 막혀서 죽는 건가, 생각하다가 살아나서 그래, 이렇게 죽는 것도 괜찮겠다….”
공연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을까? 그는 광속으로 답했다. “할 수 있어요, 공연은.”
1970년, 광주의 한 극장에서 제대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아팠던 배호가 생각났다. 그때 그는 누군가의 등에 업힌 채로 노래했었다.
“배호 선생을 어떻게 아세요? 저희 세대예요. 정말 좋은 가수죠. 소리는 타고나요. 슬픈 노래가 슬프게 들리는 건 부르는 사람이 슬퍼서가 아니라 타고났기 때문이에요. 노력만으로 되지 않아요. 제가 보기에는, 톱에 올라선 사람들은, 예를 들어 결핍된 가정 아이들이 많아요. 걱정 없이 자란 아이는 절대 슬픈 노래 못 불러요. 마음 아프게 살았거나 어릴 때 이별을 겪은 사람들은 그냥 불러도 슬퍼요.”
최백호 노래가 더 슬펐다. 그가 ‘영일만 친구’더러 젊은 날 뛰는 가슴 안고 지평선까지 돛을 높이 올리자고 노래해도, 부푼 돛단배의 이상과 그의 실시간 우울은 어긋나 보였다. 그가 전압이 차오른 목소리로 쏟아지는 빗속을 ‘뛰어’보라고 권해도 즐거울 것 같지 않았다.
“‘뛰어’는 가사가 되게 슬픈 노래예요.”
“부딪히는 빗방울이 즐겁다고 하는데도요?”
“네. 제가 그런 유의 노래만 불러서 그럴 거예요. 제가 힘든 일을 많이 겪어서 그게 제 몸짓에 목소리에 다 배어 있지 않나…. 그래도 저 자체는 굉장히 밝고, 굉장히 긍정적이고, 굉장히 활동적이에요.”
2014년 12월 서울 마포구에 설립한 비영리 공간 ‘뮤지스땅스’에서. 뮤지스땅스는 독립음악인들을 지원하는 지하본부를 표방했고 최백호는 그곳의 ‘대장’을 맡았다. 사진은 2017년 12월28일에 찍은 것이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글쓰던 어머니 영향에 곡 짓고 노래
정치인 아버지도 어릴 때 세상 떠나
어릴 때 사후 공포 굉장히 시달려
투어중 쓰러져도 “할 수 있어요, 공연”
한시간이 지났다. 카페 매니저는 코로나로 한시간만 있을 수 있다고 고지했기 때문에 조금 초조해져서 시계를 흘끔대는데 그는 오히려 여행을 떠나는 사람처럼 입술이 부풀었다.
그는 자기가 이중적이란 걸 알까. 허심탄회한데도 방어적이고, 초월적으로 보이면서도 완강한 두려움에 싸여 있고, 음울해 보이나 내적인 강인함은 뚫고 들어갈 수 없다. 그렇게 민감한 사람이 무정하리만큼 방심하게 말하다니. 카메라를 거북해하는 듯 너무나 포토제닉하고, 옷으로 사치하지 않으면서 배색과 재질에 밝으며, 오디오 장비 욕심은 없는데 자동차 시승기를 쓸 만큼 기계를 잘 안다. 석양 아래 선 방랑자 같으면서도 아버지의 피가 준 정치적 기질, 세속에 둔한 듯 보이나 독립 음악인들을 위한 비영리 공간 ‘뮤지스땅스’를 운영하던 행정적인 두뇌. 무엇보다 스니커즈를 좋아하는 소년 취향을 보면, 얼굴만 청년인 현자거나 에고가 강한 아이일 것이다.
“저는 내 자신에게 애정이 지나쳐요. 그래서 항상 불안해요. 약간 몸이 아파도. 그리고 굉장히 예민해요. 잡념이 너무 많아서 머리가 쉬지 못해요. 낯선 나라에 가서 바닷가에 해먹 하나 놓고 드러눕는 건 절대 못 합니다. 지금도 폰을 무지하게 봐요. 생각을 멈추기 위해.”
인간이 어떻게 생각을 지울 수 있을까? 세상에서 제일 괴로운 건 끊임없이 떠오르는 생각인데.
“선(禪) 생각도 해봤어요. 오대산 월정사 들어가서 며칠 혼자 있어도 봤는데 안 돼요. 더 복잡해.”
음악의 환영은 노래가 어떤 사람의 삶과 아주 가까이 있다고 믿게 하는 것이다. 진실은 그 반대이다. 음악은 정형이지만 삶은 무정형이니까. 인간적 강렬함의 한 축과 폐쇄된 지각의 다른 축 사이를 오가는 사이 그도 나이를 먹었다.
“젊은 사람들은 저 몰라요. ‘부산에 가면’하고 ‘바다 끝’을 많이 듣는다는 건 알아요. 그런데 그 노래를 부른 저하고 ‘낭만에 대하여’를 부른 저하고는 다른 사람인가 봐요. ‘바다 끝’은 제가 만든 노래가 아니어서 공감이 떨어져요. ‘부산에 가면’은 좋아하지만 내가 만든 노래를 부를 때만큼은 아니에요. 제 공연 때는 별로 안 불러요. 부산에 갈 땐 불러요. ‘바다 끝’은 안 부르고. 중년들은 모르니까요. 지금까지 앨범을 스물몇장 냈는데 알려진 건 네다섯개. 나머지 앨범들은 어떤 면에선 좌절이죠. 젊을 땐 그게 힘들었는데 이젠 괜찮아요. 이제는 경제적으로 안정됐으니까. ‘낭만에 대하여’라는 히트곡이 없었다면 지금도 생활에 쪼들리겠죠.”
불안정이야말로 진짜 굶주림. 그는 세속을 떠나 나뭇등걸 위에서 음풍농월이나 하는 사람이 아니다.
“정말 바빠진 건 육십 넘어서였어요. 이 상태는 그리 오래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각오는 하고 있어요. 그런데 아흔이 돼도 저는 ‘입영전야’를 부를 수 있거든요. 소리가 안 나올 때도 노래하는 방법이 있어요. 젊었을 때 한 호흡으로 했다면 네 호흡으로 나눠서 해도 얼마든지 가사를 표현할 수 있어요. 여든에는 여든의 호흡으로 노래하면 돼요.”
패티 김은 왜 은퇴했을까? 어째서 보컬의 제한선을 그어버린 걸까? 얼마나 노래하고 싶을까? 지금 노래를 하면 얼마나 좋을까?
“패티 김 선생님은 자꾸 20대 때 소리가 안 나와서 답답한 거죠. 저는 패티 김 선생님하고 개인적인 친분이 없지만, 언제 한번 만나 뵙고 얘기하고 싶어요. 노래를 하시라고.”
최백호의 노래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는 알겠지만 언제 멈출지는 알 수 없다.
“구십엔 지금보다 훨씬 더 깊은 노래를 할 수 있겠죠.”
“아무리 노래해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다면 그래도 노래하며 살 수 있나요?”
“그럼요!”
그는 스탠드 마이크로 노래한다. “손에 마이크를 드는 게 어색해서”라고 답했다. 한국음악발전소 제공
잭 케루악 ‘길 위에서’ 금서였죠
무라카미 하루키는 진정성 없어요
미술도 문학도 인간이 만든 세계
음악은 우주서 온 무궁무진한 것
그는 고양이처럼 ‘지금’을 살고 있다. 변덕스럽고, 끝도 없이 새것을 요구하는 세상의 마디마다 최백호가 있다. 영화 <자산어보>에도, 드라마 <괴물> <나빌레라>에도, 매일 밤의 에프엠(FM) 라디오에도, 새로 론칭한 ‘낭만이즈백’ 유튜브 채널에도 있다. 줄곧 내는 앨범에, 테슬라 모델 3에, 화실에, 이미 써둔 시나리오 안에, 유예된 영화감독의 꿈 안에 있다. 그는 결코 히트곡 하나가 일종의 안전핀이자 노령연금이 되는 왕년의 가수나 흘러간 가수가 될 수 없을 것이다.
“품위는 중요해요. 자기 기준을 지켜나간다는 게 쉽지는 않잖아요. 저는 어릴 때 교과서에 나오는 ‘큰 바위 얼굴’처럼 남고 싶어요. 외적인 모든 것에서 좋은 선배 가수 모델이 되고 싶어요. 삶이 끝난 뒤에 아이들의 아이들한테 우리 할아버지가 이상한 노래 만들었어, 그런 이야기 듣고 싶지 않아요.”
그는 새벽 시간을 제일 좋아한다고 했다.
“전 잠이 별로 없어요. 네시간 자요. 6시 반이면 일어나요. 2시쯤 자거든요. 방송이 12시에 끝나서.”
그는 매번 도치법으로 말했다. 지금 대답은 수순을 뒤집어 “방송이 12시에 끝나서”로 시작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이미 ‘실연의 달콤함’ 같은 반어법에 익숙해져버린 것을.
이 다독가는 얼마 전 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를 재독했다.
“20대 때 <길 위에서>는 금서였어요. 군사정권 때, 미국 히피들의 자유로움을 갈망할 때 나왔으니까. 나이 들어 완본을 보니 문학적으로 가치 있진 않더라고요. 지금 젊은이들은 우리가 느낀 감동 모를 거예요. 지금은 아주 흔해졌잖아요, 미국 문화라는 게.”
기형도 전집도 읽었다. “어떻게 이렇게 세상을 보는 눈이 나와 완전히 다를까? 외롭고 쓸쓸하고 달콤해.”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를 읽다가는 화가 났다.
“그 사람은 진실성이 없어. 진정성이 없어요.”
“소설가의 진실을 무엇으로 가늠하죠?”
“너무 완벽하게 딱 짜였어요.”
모든 것이 순수한 불평인 소년에게는 완벽한 것도 불완전한 것. 그에게 ‘진정성’이란 탈취 불가능한 권리였다.
삶에 큰 게 기다릴 줄 알았는데
70대는 60대와 느낌이 참 달라요
너무 슬퍼하지 말라 말하고 싶어
“미술이나 문학이나 인간이 만든 인간의 세계라고 생각해요. 음악은 먼 우주에서 왔어요. 어떤 사람들은 이미 좋은 멜로디가 다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무궁무진해요. 그러니까 저도 70대에 훨씬 더 좋은 노래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지금 그는 ‘두개의 술잔’ 한곡을 발표하기 직전이다.
“미사리에서 노래할 때 무대에 앉아 보는데, 어떤 여자가 남자하고 술을 마시다가 다투더니 그대로 나갔어요. 그때 혼자 앉아 있는 남자애를 보면서 썼어요. 술잔은 두개인데 혼자 남았다.”
음악은 멜로디의 저장고. 하모니란 삶 속에 있는 것. 그에게 노래가 되지 않는 순간은 없다. 집에 오디오 시스템도 없이, 기타 하나와 ‘엉터리 같은’ 피아노밖에 없는 채. 장르도 없다. 가사를 먼저 쓰고 장르를 정하니까. 중요한 것은 장르가 아니라 노랫말의 목적이니까.
마지막으로 이제는 아무도 묻지 않는 질문을 했다.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연대기가 무색하도록 언제까지나 젊은 사람에게라면 꼭 묻고 싶었다.
“내 삶에 뭔가 큰 게 기다릴 줄 알았는데 내일도 똑같다는 게 너무 실망이었어요. 사실 라디오를 그만두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 뒤에 더 나은 하루가 기다린다? 아니에요. 그래서 못 그만두었어요. 70대는 60대하고 느낌이 참 달라요. 하루의 시간들이 심각해져요. 죽음이 현실화되고, 주변 친구들이 하나씩 떠나지만, 그래, 별거 아니라고,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아무리 작은 질문에도 그렇게 최대치로 답해주는 어른은 평생 본 적이 없었다. 어떤 면으론 똑같은 테이프를 기계 두개에 넣고 플레이하는 것 같았다. 모든 걸 털어놓는 목소리가 머릿속에 들어왔다 다른 귀로 흘러 들어갈 때 본 적도 없는 도라지 위스키의 맛이 났다.
그날 저녁, 집에서 ‘낭만에 대하여’를 틀었다. 그는 우리들의 ‘부에나비스타’가 되었지만, 탱고의 4분의4 박자는 어쩐지 무서웠다. 모호함이 춤추는 추억 속에서 영원히 회상해야 하는 벌을 받는 것 같아서.
‘낙엽은 지는데’를 듣다가 자리에서 꼼짝 못한 채 볼에 웃음을 띠었다. 그 노래를 들을 때 일반적으로 기대하던 감정은 아니었다. 그냥, 그는 고독을 노래하지만 그 노래로 덜 외로울 수 있다는 것을 처음 느낀 것 같았다.
녹취 홍혜원
▶ 이충걸 작가. <행복이 가득한 집> <보그> 에디터를 거쳐 2001년부터 2018년까지 <지큐 코리아> 편집장을 맡았다. 첫 소설집 <완전히 불완전한>, 인터뷰집 <해를 등지고 놀다>와 18년 동안 써온 ‘에디터스 레터’를 모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우리의 특별함>, 엄마의 이야기를 다룬 에세이 <엄마는 어쩌면 그렇게>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