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무용계 ‘멋진 언니’들 장은정(왼쪽부터) 황미숙, 김영미가 지난 26일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모였다. 카메라 앞에 선 세 사람은 별다른 주문이 없었지만 춤을 추 듯 동작을 바꿨다. 서로 손을 맞잡더니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게 렌즈 안으로 다가왔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신나는 이 언니들을 보라!’ 지난 26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사옥에 모인 세 사람은 지금 당장 토크 예능 <라디오 스타>(문화방송)에 출연해도 손색없을 것 같은 입담을 자랑했다. 2시간 인터뷰 내내 쉴 새 없이 이야기와 웃음을 쏟아냈다. 김영미(55)·장은정(56)·황미숙(60). 이들은 배우인가? 예능인인가? 아니다. 현대무용가다!
“무용가들은 대부분 성격이 조용할 것 같았다고요? 어머, 저희 조용해요. 하하하~”(장은정) 카메라 앞에서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적극적인 동작으로 분위기를 띄우며 장난치는데, 그 모습만 보면 나이를 가늠할 수 없다. “우리가 철이 없어서 그래요. 며느리가 올해 제 환갑잔치 때 초를 하나만 켰어요. ‘어머니 첫돌입니다’ 하면서요. 하하하~”(황미숙)
환갑? ‘50~60대에도 현역에서 활동하는 현대무용가’란 일반적인 칭송 문패가 이젠 얼마나 의미 없는 수식어인가. 70대에 ‘오스카’ 트로피를 들어 올리며 한국 영화계를 빛낸 배우 윤여정처럼, 순수예술계를 지키고 있는 ‘현대무용계의 윤여정’들과의 만남은 시작부터 선입견을 깼다.
황미숙 신작 <구두>. 선택의 과정에서 느끼는 불안, 초조 등의 감정을 표현했다. 모다페 제공
김영미, 장은정, 황미숙이 살아온 현대무용가의 삶도 배우 윤여정처럼 틀을 깨려는 도전의 연속이었다. 1980년대에 데뷔한 세 사람이 30년이 넘도록 현역에서 활동하는 것 자체가 성과다. 발레, 한국무용, 현대무용에선 무용가들의 활동 수명이 짧다. 보통 30대 중반 정도가 되면 안무가 등 다른 직업으로 전향하는 등 무대를 떠나는 게 일반적이다. 물론 이들도 안무가이자 교수로 활동하지만 몸소 표현하는 무대를 떠나지는 않았다. 황미숙은 “현대무용계에서 활동하는 50대 이상 무용가는 10명 남짓”이라고 했다. 50대 이상 무용가를 꼽아봤자 다섯 손가락 안일 것이라는 발레·한국무용계보다 수는 많지만, 이들이 공연할 기회는 오히려 적다고 한다. 현대무용계에선 국립과 시립 두 곳을 제외하면 대부분 개인이 운영하는 무용단에서 공연을 만든다. 활동할 수 있는 무용단이 두곳이란 점도 문제지만, 중장년에 접어들면 자연스럽게 떠나야 하는 분위기라 이후에도 춤을 이어가고 싶다면 개인 무용단을 차릴 수밖에 없다.
황미숙은 파사무용단, 김영미는 김영미댄스프로젝트 대표를 맡고 있다. 좋은 작품을 만들려면 비용이 많이 든다. 황미숙은 “1년 동안 열심히 돈을 번 뒤에 공연을 올리는 과정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보통 1년에 한편이 기본이고, 많게는 서너번 정도 무대를 만든다”고 말했다. 이런 환경에서 ‘후배’ 그리고 ‘동료’라는 존재는 에너지가 된다. 장은정은 “선배인 황미숙 언니보다 하루 더 춤을 춰야지, 하는 생각으로 이 길을 따라가고 있다”며 “언니가 없었으면 나도 (이 나이에) 할 수 있다는 생각은 못 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장은정의 재연작 <정확한 침묵>. 모다페 제공
이들은 모두 이 ‘바닥’에서 이름을 떨쳤다. 장은정은 2007년 한국춤평론가회 춤비평가상, 2017년 댄스비전 최고안무가상 등을 받았다. 김영미는 대한민국 무용대상 대통령상을 받았다. 황미숙은 2005년 서울무용제 대상, 2018년 한국춤평론가회 춤연기상을 받는 등 이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수상 대열에 이름을 올렸다. 세월에 따라 나이테가 촘촘히 쌓여 체력은 고갈되었더라도 실력만은 변하지 않은 이들이다. “몸이 힘들지 않으냐고들 많이 묻는데, 아직 ‘날이 흐리면 뼈마디가 쑤신다’는 게 뭔지 몰라요. 하하하.”(황미숙) 황미숙 옆에서 김영미가 말을 거든다. “현대무용은 20대, 30대, 40대 등 자신의 몸에 맞게 춤을 추면 되니 조금 나아요. 나이듦 등 인간 본성을 몸으로 표현하는 장르이기에 다른 종류의 무용에 견줘 큰 힘이 들지 않는 편”이라고 했다.
이들의 겸손엔 이유가 있다. 기본적으로 자기관리가 철저한 프로들이다. 장은정은 “지금도 삼시 세끼를 다 먹지는 않는다”며 “우리 세명이 짬뽕 한그릇을 다 비우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몸이 무거우면 춤을 못 추겠더라고요. 기본적으로 배가 비어 있어야 편해요”(황미숙), “춤을 잘 추기 위해 내 시간 대부분을 바친 젊은 시절부터 해온 게 습관이 됐다”는 김영미의 말에서 프로 정신이 읽힌다. “그래서 살이 안 빠지나 봐. 늘 조금 먹는 게 습관이 되어서”라며 웃은 황미숙은 58살이었던 2년 전 15일에 걸쳐 매일 1시간10분짜리 공연을 하는, 무용계에선 보기 드문 시도를 하기도 했다.
젊은 시절엔 그저 춤을 잘 추기 위해 노력했다면, 50살이 훨씬 넘어선 이제는 춤에서 한발짝 떨어져서 큰 그림을 보게 됐다고 이들은 말한다. “젊었을 때는 개인적인 성취감이 우선이었다면, 이제는 공적인 마인드가 생겼다”(김영미)는 것이다. “춤이 얼마나 좋은 건지 너무 잘 아니까요. 이 좋은 춤이 우리 사회를 질적으로 순화시킬 수 있는 매개라고 생각해요.”(장은정) 춤으로 스트레스를 덜고 갈등을 해소한 경험을 많은 이들에게 전파하고 싶단다.
‘신나는 언니’들은 생각으로만 그치지 않고 이미 행동으로 옮겼다. 황미숙은 ‘비행청소년’ 등을 대상으로 움직임을 통한 심리 치료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다. 장은정은 일반인을 상대로 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선보이고 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마음의 안정을 찾는 이가 많다고 한다. 김영미는 “30대 중반 넘어서는 무용 이외의 것도 잘 가르치는 사람이 되자고 생각했다”며 제자들에게 실력을 넘어 인성의 중요성을 특히 강조한다.
후배들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일도 멈추지 않는다. 현대무용가들이 춤만 열심히 추면 고민 대부분이 해결되는 풍토가 조성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려면 바뀌어야 할 것이 많다. 현대무용계가 발전하는 길이기도 하다. 이들은 “학생들이 졸업해도 활동할 수 있는 무대가 별로 없다”는 걸 가장 큰 문제점으로 꼽았다. 이런 현실 때문에 필라테스 자격증을 따서 생계를 잇는 식으로 춤을 포기하고 다른 길로 가는 경우가 많다. 학교 동문 위주로 무용단을 구성해 공연하는 문화도 현대무용계의 발전을 저해한다. 김영미는 “잘하는 신인이 등장하면 그 무용수에게 집중해 다작을 하게 하면서 빠르게 소비해버리는 관행도 바뀌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무엇보다 순수예술에 대한 지원 정책이 중요하다는 게 이들의 생각이다. 황미숙은 “장르별로 어떻게 지원하는 것이 효율적인지 파악한 뒤 정책이 정해져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게 현실”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연령대별로 다양한 지원도 필요하다. 장은정은 “40살이 넘으면 설 자리가 없어진다는 걸 온몸으로 느낀다”고 말했다. 좋은 선배 없이는 좋은 후배가 클 수 없다. 그들 말대로 보고 배울 본보기가 있어야 한다.
‘활동 수명’ 짧은 현대무용계에서 50~60대에도 무대에 오르며 틀을 깨는 ‘세 언니’들. 김영미(왼쪽부터), 장은정, 황미숙. 모다페 제공
‘지치지 않느냐’는 질문에 이들은 ‘그게 뭐지?’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황미숙의 말에 장은정의 장난기가 발동한다. “이러다 쓰러진다. 하하하.”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처럼 쉬지 않고 계속 가는 게 우리들 같다”는 김영미의 말처럼 이들의 춤은 멈추지 않는다. “70살 정도 되면 30분 동안 아무 동작도 안 하는 무대를 셋이서 꼭 한번 하고 싶어요. 연극을 ‘혀의 춤’이라고 하는 것처럼, 춤이 꼭 사지를 움직이는 것만은 아니거든요. 일상의 모든 것이 다 예술일 수 있습니다.”(장은정) 멈추지 않고, 쉬지 않고 달리는 그들의 무대가 앞으로도 계속되기를.
당장은 멋진 언니들이 온몸으로 표현하는 춤의 언어를 만나러 대학로에 가보자. 지금 열리고 있는 ‘제40회 국제현대무용제’ 중 하나로 김영미는 <허상화>, 황미숙은 <구두>, 장은정은 <정확한 침묵>을 새달 5~6일 서울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에서 선보인다. 20분 남짓한 1인극이다. “일단 한번 보러 와보세요. 한번 보면 못 헤어날걸요. 하하하.”(장은정) 끝까지 신나는 언니들이다.
마지막으로 팁 하나. “일상적인 동작을 극대화시킨 것이 현대무용이라고 생각한다”는 그들은 몸과 마음이 지친 <한겨레> 독자들을 위해 한가지 동작을 제안했다. “걸을 때부터 ‘내가 어떻게 걷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나’를 들여다보세요. 그게 현대무용의 시작입니다.”
남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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