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네스쿠 콩쿠르 첼로 부문 우승을 차지한 한재민(오른쪽)과 스승 이강호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가 1일 서울 한예종 서초캠퍼스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정혁준 기자
지난달 15일 저녁 6시께(현지시각)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에서 열린 ‘제오르제 에네스쿠 국제 콩쿠르’ 첼로 부문 결선 무대. 앳돼 보이는 15살 동양인 연주자가 첼로 현을 켰다. 쇼스타코비치의 ‘첼로 협주곡 1번’(작품번호 107번)이었다.
경쾌한 1장을 거쳐 변칙적인 론도 소나타 형식의 4장까지, 30여분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관객은 숨을 죽여가며 선율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였다.
10대 첼리스트는 띠동갑뻘인 20대 후반의 독일과 루마니아 첼리스트를 제치고 1위에 올랐다.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 1학년 한재민이 그 주인공이다. 에네스쿠는 동유럽권을 대표하는 국제 콩쿠르다. 한재민은 이 콩쿠르 악기 전 부문을 통틀어 사상 최연소 1위 수상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루마니아에서 귀국한 뒤 ‘2주 자가격리’를 끝낸 한재민과 그의 스승 이강호 한예종 교수를 지난 1일 서울 서초구 한예종 서초캠퍼스에서 만났다.
한재민에게 소감부터 물었다. “발표 나는 순간이 우리나라 시간으론 새벽 4시쯤이었는데,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걸 보고 친구들이 휴대전화로 메시지를 보내 깜짝 놀랐어요. 당연히 기분이 너무 좋은데, 기대하고 간 콩쿠르는 아니라 신기하기도 하고 얼떨떨하기도 해요.”
기대를 안 했는데 우승했다고? 은근히 ‘첼로 천재’임을 자랑하는 건가?
이 교수의 말을 들어보니 그게 아니었다. “재민이가 처음엔 기본기를 좀 더 공부하기 위해 대회에 나가지 않으려 했죠. 하지만 대회에 도전하면서 자신의 강점과 약점을 제대로 볼 수 있다고 설득했죠. 이번 콩쿠르가 청소년 대상 대회가 아니라 성인 대회여서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부담 가질 필요가 없다고 설득했죠.”
한재민이 지난달 15일(현지시각) 루마니아에서 열린 ‘제오르제 에네스쿠 국제 콩쿠르 첼로 부문’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제오르제 에네스쿠 국제 콩쿠르 제공
한재민이 스승의 말을 받으며 ‘티키타카’(축구에서 짧은 패스를 주고받듯이 하는 대화)를 이어갔다. “네. 안 나가려다가 용기를 주셔서 도전할 수 있었어요. 저처럼 어린 나이의 첼리스트는 없으니 ‘떨어져도 잃을 게 없다’며 부담 갖지 말라고 하셨어요.”
영상으로 치른 1·2차 예선은 지난해 가을부터 준비했다. 바쁠 때였다. 한재민은 지난해 6월 한예종 예술영재 선발시험에 합격해 대학생이 됐다. 중학생에서 갑자기 대학생이 된 그는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싶어 고졸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콩쿠르 준비와 검정고시 준비가 겹치는 통에 바쁜 나날을 보냈지만, 현지에서 7명이 치르는 준결선에 진출할 수 있었다.
3명으로 좁혀진 결선에선 쇼스타코비치·드보르자크·엘가 등 작곡가 5명 작품 가운데 한 곡을 선택해야 했다. 한재민의 선택은 쇼스타코비치였다. “쇼스타코비치 곡을 워낙 좋아했어요. 게다가 힘이 있어요. 제 덩치 보시면 아시겠지만 제가 힘이 넘쳐나는 스타일이에요.(웃음)”
어린 나이에 큰 무대 도전인데 떨리진 않았을까? “준결선에선 정말 많이 떨었지만, 결선 때는 그렇지 않았죠. ‘결선에만 오르면 좋겠다’는 게 목표였어요. 이미 목표를 달성했으니 떨리지 않았던 것 같아요.”
이 교수에게 제자를 어떻게 가르쳤는지 물었다. “재민이는 자기 음악에 관한 생각은 확고하지만, 고민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이런 고민을 잘 풀어나가도록 도와주는 게 스승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기술적인 부분만을 가르쳐 복제인간을 만들려는 생각은 하나도 없어요. 곡을 제대로 이해하고,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게 잡아주는 게 스승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자는 또 ‘티키타카’로 스승의 말을 받았다. “교수님 말씀이 맞는 것 같아요. 콩쿠르 반주자(피아니스트)를 한국에서 함께 모시고 갈 수 없어, 준결선에서 루마니아 국적의 피아니스트와 무대를 함께했는데요. 작품이 가진 여러 정서나 관련 이야기를 피아니스트가 들려줘서 연주에 도움이 됐어요.”
한재민은 금호문화재단의 ‘금호영재’ 출신이다. 올해 특히 금호영재 출신들이 국제대회를 휩쓸고 있다. 피아니스트 김수연은 지난달 14일 캐나다 ‘몬트리올 국제 음악 콩쿠르’에서 한국 피아니스트로는 처음으로 1위에 올랐다. 소프라노 김효영도 지난달 16일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에릭 앤 도미니크 라퐁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금호영재는 매년 상반기와 하반기에 열리는 오디션을 거쳐 선발한다. 이루리 금호문화재단 대리는 “선발된 연주자는 매주 토요일 ‘금호아트홀 연세’에서 연주하는 기회를 갖는다”며 “피아니스트 김선욱·손열음·조성진, 바이올리니스트 신지아, 비올리스트 이한나, 플루티스트 조성현, 오보이스트 함경, 클라리네티스트 김한 등 국내외에서 주목받는 젊은 음악인들이 금호영재를 거쳐 음악계에 데뷔해 성장하고 있다”고 했다.
그중 막내 격인 한재민의 꿈은 뭘까? “단기적으론 관객에게 좋은 연주자로 기억되고 싶고요. 장기적으론 연주만 하는 연주자가 아니라, 음악과 예술을 아우르는 예술가가 되고 싶어요.”
정혁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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