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근리 사건 다룬 ‘작은 연못’
객관의 눈길로 다가선 ‘진실의 비명소리’
배우·스태프 자발적 참여 ‘공동체 영화’ 한국전쟁 판 ‘밀라이 학살’인 노근리 사건을 영화화한 <작은 연못>이 14회 부산국제영화제 갈라 프레젠테이션 초청작으로 처음 관객들을 만났다. 여느 농촌과 다를 바 없는 평온한 마을. 아이들이 티격태격하며 노래자랑 대회를 준비하고, 어른들이 부부싸움과 내기 바둑으로 소일할 때만 해도 관객들은 편안한 마음으로 순박한 유머를 즐긴다. 긴장이 시작되는 건 일본인 통역을 앞세운 미군이 마을을 비우라는 명령을 내리면서부터. 그리고 마침내, 기찻길과 쌍굴에서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폭격과 총격에 쓰러져가는 무고한 사람들을 보면서 객석은 거의 눈물바다가 된다. 쏘는 쪽도 맞는 쪽도 왜 이러는지 알 수 없는 비참한 상황. 누구나 알고 있는 결말이지만, 우리 부모 형제들이 실제로 감내해야 했던 슬픈 실화라는 사실이 더욱 아프게 다가온다.
영화는 주인공을 내세워 감정이입을 하게 만드는 할리우드식 연출 기법을 일부러 피하고, 마을 주민 모두를 골고루 비춘다. 흥행을 생각하면 위험한 결단일 수 있겠지만, 덕분에 영화는 객관적인 시야를 확보하고, 감동의 눈금은 한층 올라간다. 아무것도 모르고, 앉아서 당하는 것이야말로 이 사건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초보 감독이 이런 대작을 찍었다는 사실이 놀라운 일인데, 연출가 이상우(58·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씨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의문은 풀린다. 영화계에서는 신인이지만, 연극계에서는 <칠수와 만수>(1986) <늙은 도둑 이야기>(1989) 등으로 유명한 대표 연출가다.
<작은 연못>에는 배우 142명과 스태프 229명이 참여했다. 현장 답사·자료 조사와 시나리오 집필에 3년, 촬영과 후반 작업에 4년이 걸린 역작이다. 배우·스태프는 물론 컴퓨터그래픽 회사와 세트 제작 업체, 현상소와 녹음실, 배우 수송용 버스 회사까지 모두 ‘노무 출자’ 혹은 ‘현물 출자’로 투자한, 명실상부한 공동체 영화다. 이들의 자발적인 참여 덕에 제작비 40억여원 규모의 영화를 실비 12억원으로 만들 수 있었다. 연내 개봉 예정.
부산/이재성 기자 san@hani.co.kr
‘작은 연못’ 7년 고행 이상우 감독 “주인공 없는 영화? 무식해서 용감한 짓
누가 쏘는지 주민들은 모르지 않았겠나
-노근리 사건을 영화로 만들게 된 이유는?
“일이 처음 시작된 것은 배우 문성근씨가 노근리 사건을 특종보도한 에이피(AP)통신의 최상훈 기자를 만나면서부터였다. 최 기자 등은 2000년 퓰리처상을 받고 <노근리 다리>란 책을 냈다. 번역본이 나오자 왜 한국에서 이런 소재로 영화가 만들어지지 않는 건지 얘기가 나왔고, 시나리오를 써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연출은 원래 최호 감독이 하기로 돼 있었는데, 다른 영화가 생겨 빠지면서 내가 감독까지 하게 됐다.”
-초보 감독 작품 같지 않다. 연출할 때 가장 신경 쓴 부분은?
“시나리오는 몇 번 써봤지만, 영화 연출은 처음이라 고민이 많았다. 이창동 감독을 비롯한 여러 친구들한테 얘기를 많이 들었다. 그러면서 혼자 정리한 게 ‘내가 뭘 하려는지 내가 분명히 알면 나머지는 촬영감독 같은 분들이 알아서 해줄 것’이란 생각이었다. 카메라 움직임이나 이런 거 간섭하지 않는다. 대신 정직하게 가자고 얘기했다. 기교 부리지 말자고. 스태프들이 워낙 뛰어난 분들이었다.”
-영화 <화려한 휴가>처럼 주인공을 내세워 감정이입을 시키는 방식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주인공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 번도 안 했다. 처음 마을 사람을 200명으로 잡았는데 너무 많다고 해서 57명으로 줄였다. 마을 사람 전체가 주인공이 된다고 했더니 주변에서 다들 말렸다. 그렇게 해서는 관객이 안 든다는 얘기였는데, 내가 고집을 피웠다. 아기자기하게 재미있게 살던 사람들이 말하자면 느닷없는 폭력을 당하는 얘기니까 동네 사람 전체가 주인공이라고 생각했다. 무슨 영웅이 있는 것도 아니고. 주인공을 세웠다간 이상한 멜로드라마가 될 가능성도 있을 것 같았다. 나중에 후반 작업 하면서 사람들이 하는 말이 초짜 감독이 어떻게 이런 선택을 했냐고 하더라. 내가 영화를 모르니까 무식해서 용감했던 것 같다.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타협하려고 했을 텐데.”
-배우와 감독이 모두 연극판 출신이어서인지 연기 앙상블이 훌륭하다. 저절로 되지는 않았을 텐데?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을 거다. 나랑 같이 연극한 사람만 30명이 넘고, 대부분 연극동네에서 알던 사람들이다. 송강호, 유해진이 하루씩 출연했고, 문소리는 3, 4일 정도 있었다. 문성근은 처음부터 끝까지 있었고. 할아버지 역 두 사람도 대학 연극반 선배들이다. 가족들도 실제 가족이 많다. 애들 중에는 내가 태어날 때부터 본 애들도 있고. 카메라 감독이 이런 영화 처음 봤다고 하더라. 카메라를 손에 들고 뛰는데 어디를 찍어도 그림이 된다고. 100여명 중에 한 사람도 엄한 짓 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어느 정도 영화적 성과가 있었다면 그건 배우들 덕분이다.”
-미군의 총격이 가해지는 중반 이후는 거의 다큐멘터리처럼 보인다.
“객관적으로 보이게 하려고 노력했다. 누가 반미 영화 아니냐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전쟁이라는 걸 다른 각도로 보면 안 되느냐, 그런 제안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총 쏘는 사람은 가급적 안 보여 주려고 했다. 우리는 전쟁을 반대한다고 하면서도 전쟁 영화를 보며 악마적 쾌감을 느낀다. 그런 걸 거꾸로 뒤집어보면 어떨까, 총 쏘고 뛰어다니고 이런 화려한 스펙터클을 보여주지 않을 때 오히려 감동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설마 미군이 쏘겄어? 빨갱이들이 쏘겄지?”라는 대사가 다른 인물에게서 두 번이나 나온다. 색깔 논쟁을 방지하기 위한 것인가?
“그런 대사를 실제로 주민들이 했는지 모르겠지만, 미군이 쏜다고 절대 생각하지 못했다는 증언은 있다. 그게 아이러니 아닌가. 총 쏘는 건 안 보인다. 그냥 쓰러질 뿐. 주민들은 끝까지 몰랐을 수 있다. 에이피 기자들 인터뷰에는 미군 중에 아직도 가늠쇠 안으로 철길을 뛰어가는 여자아이가 보인다는 사람이 있다. 자기가 그 아이를 쏘았을 것이라며 지금도 고통스러워하며 병원 신세를 지고 있다고 한다.”
부산/이재성 기자, 사진 부산국제영화제 제공
배우·스태프 자발적 참여 ‘공동체 영화’ 한국전쟁 판 ‘밀라이 학살’인 노근리 사건을 영화화한 <작은 연못>이 14회 부산국제영화제 갈라 프레젠테이션 초청작으로 처음 관객들을 만났다. 여느 농촌과 다를 바 없는 평온한 마을. 아이들이 티격태격하며 노래자랑 대회를 준비하고, 어른들이 부부싸움과 내기 바둑으로 소일할 때만 해도 관객들은 편안한 마음으로 순박한 유머를 즐긴다. 긴장이 시작되는 건 일본인 통역을 앞세운 미군이 마을을 비우라는 명령을 내리면서부터. 그리고 마침내, 기찻길과 쌍굴에서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폭격과 총격에 쓰러져가는 무고한 사람들을 보면서 객석은 거의 눈물바다가 된다. 쏘는 쪽도 맞는 쪽도 왜 이러는지 알 수 없는 비참한 상황. 누구나 알고 있는 결말이지만, 우리 부모 형제들이 실제로 감내해야 했던 슬픈 실화라는 사실이 더욱 아프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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