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는 현실의 거울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요즘 우리나라의 드라마는 현실을 조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몸 담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욕망만을 거침없이 표현해내려고 애쓰는 거 같다.
그런 욕망의 분출은, 직접적으로는 '서사'의 불충실로 나타나는데, 주인공의 슬픈 운명을 위해, 등장한 지 5분도 안된 주인공의 오빠를 물 속에 수장시켜 버린다던가, 뜬금없이 시민들은 1인 시위도 안되는 광화문 네 거리를 점령하고 가두전을 벌이는 첩보전을 벌인다던다가 , 굳이 개연성 있는 이유 없이 툭툭 씬들이 등장하고 사건들이 나열되며, 작가들은 나날이 그들을 붙잡는 시청률과 좀 더 본질적으로는 광고라는 또 다른 욕망을 위해 좌충우돌 이야기의 연유 따위는 던져 버린다.
그러기에 한 때, 문제 의식있는 작품을 그려내기로 유명했던 상도의 두 작가가, 현재 가장 시청률을 잘 올리면서도, 가장 스토리상에서 부실하다 욕을 먹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와중에서도, 작품을 거듭할 수록 발전을 거듭하며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을 하게 만드는 이가 있으니, 바로 <지붕 뚫고 하이킥>의 김병욱 이다. 그의 시트콤은, 사람과 사람이 부대껴 살면서 일어나는 상황을 섬세하게 잡는데 일가견이 있었다. 그저 웃기는 것이 아니라, 이런 사람과 저런 사람, 혹은 아니다 하면서도 서열과 우열이 나누어지는 인간 세상을 웃기게 잘 그려냈던 거였다.
그러던 그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노욕인지, 물욕인지, 타협인지, 방황인지 모를 헤매임을 보이는 현 시점에, 강직하게, 우리 모습을 예전보다 오히려 첨예하게, 슬프게, 적나라하게 그려 내고 있다.
어제 방영된 <지붕 뚫고 하이킥>은 지지리도 산수를 못하는 해리가 어떻게 시험을 잘 보게 되었는가에 대한 내용을 다뤘다. 간단한 것이었다. 세경 자매를 눈에 가시처럼 여기며, 특히나 신애가 가진 것이면 언니조차 빼앗으려하는 철없는 해리의 욕심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때려 죽여도 8-5는 못하는 해리에게, 니가 당근을 여덟 개 가졌는데, 해리가 다섯 개를 먹으면 몇 개가 남겠느냐는 식으로 분노의 계산질을 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한 문제 한 문제 풀 때마다, 당장 뛰어나갈 듯 흥분하며 문제를 푼 해리는 성공적으로(?) 80점을 맞았다. 그리고 집에서 초조하게 해리의 결과를 기다리던 보석과 현경은 해리의 시험지와 해리를 안고 기쁨의 눈물까지 흘리고. 분명 웃기는 거 맞고, 그래서 그걸 보면서 깔깔 웃어야 되는데, 나오는 건 '허'하는 헛웃음에, 남겨진 건 묵직한 씁쓸함이었다.
동생네 아이가 중학생인데 전학을 갔다. 고지식하고 그다지 사교성이 좋지 않았던 아이는 전학간 반 아이들과 쉽게 친해지지 않았다. 게다가 때론 뜬금없이 엉뚱한 소리를 하곤 하는 아이에게 반 아이들 중 몇몇은 찝쩍거리기 시작했고, 오가며 툭툭 건드리기까지 했나 보더라고.
참다 참다 아이는 엄마에게 그 얘기를 했고, 엄마는 또 아빠에게 그 얘기를 했고, 머리를 끌어 안고 고민하던 부부는 아이에게 맞고 다니지는 말라는 특명을 내렸다. 그 말에 분기탱천한 건지, 떠밀려 그런 건지, 아이는 보란 듯이 그녀석들과 싸웠고 결국 기브스까지 하게 되었다. 상황은 정확히 잘 모르겠다. 반 아이들이 아이를 왕따를 시킨건지, 처음 온 아이를 다른 동물들이 새로 우리에 온 동물을 건드리듯 간을 본 건지는, 하지만, 그럴 때 내 동생 부부가 아니라, 대부분의 부모들이 우선 발끈하며 밀리지 마라, 맞고 다니지 마라는 식으로 반응하게 된다는 것이다. <지붕 뚫고 하이킥>의 해리는 극단적으로 표현했을 뿐, 일상적으로 우리는 늘 아이들을 교육, 아니 주입시키고 있다. 남한테 밀리지 마라, 뺏기지 마라, 맞지 마라 라고. 드라마는 그 상황을 단지 희극적으로 조명했을 뿐인 것이다. 그러기에 요즘 아이들은, 지우개 하나도 나누어 쓸 줄 모르고, 상대방에 대한 배려보다는, 나 불편한 거에 민감한 아이가 되어 가는 것이다. 우리는 <지붕 뚫고 하이킥>을 보면서 해리가 이상하다 했지만, 예전에 해리는 왜 빵꾸 똥꾸란 말을 쓰게 되었는가란 에피소드에서 보듯이, 그 아이를 그렇게 만든 건, 바로 어른들인 것이다. 아무 때나 방구를 끼는 할아버지, 늦게 본 귀여운 아이라고 그 아이가 하는 것이면, 가치판단 없이 무엇이든 오케이 하며 키우는 부모, 그 어른들이, 맨날 갈비만 먹여 해리를 화장실도 가기 힘든 아이로 만들었고, 그들의 무심한 사랑이 남의 것과 자기 것도 구분못하는 욕심쟁이로 만든 것이다. 부모 보석과 현경은 잘 생기고 어리숙해 보이고 사회적으로 선선해 보이는 사람들이지만, 해리의 '다 내 꺼야'란 욕망을 그 아이의 학습으로 이용할 만큼, 자신의 이익이 앞선 문제에서는 기민하고 인정사정없는 사람들인 것이다. 사실 살아가며 무서운 것은, 나쁜 사람이 나쁜 사람일 때보다는, 선선한 사람에게서 순간적으로 표출되는 욕망이 아닐까. 그리고 우리 사회가 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그 문제들이 가시화 되지 않은 채 앞으로 앞으로 성장할 지도 모른다는 환상을 밀고 나가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의 그 무서운 욕망에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지붕 뚫고 하이킥>이 전작 보다 뛰어난 것은, 바로 그 우리가 안온하게 살고 싶은 지붕을 한 방에 뻥 뚫어내고 싶은 촌철살인을 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김병욱과 작가들은 용감한 사람들이고.
참다 참다 아이는 엄마에게 그 얘기를 했고, 엄마는 또 아빠에게 그 얘기를 했고, 머리를 끌어 안고 고민하던 부부는 아이에게 맞고 다니지는 말라는 특명을 내렸다. 그 말에 분기탱천한 건지, 떠밀려 그런 건지, 아이는 보란 듯이 그녀석들과 싸웠고 결국 기브스까지 하게 되었다. 상황은 정확히 잘 모르겠다. 반 아이들이 아이를 왕따를 시킨건지, 처음 온 아이를 다른 동물들이 새로 우리에 온 동물을 건드리듯 간을 본 건지는, 하지만, 그럴 때 내 동생 부부가 아니라, 대부분의 부모들이 우선 발끈하며 밀리지 마라, 맞고 다니지 마라는 식으로 반응하게 된다는 것이다. <지붕 뚫고 하이킥>의 해리는 극단적으로 표현했을 뿐, 일상적으로 우리는 늘 아이들을 교육, 아니 주입시키고 있다. 남한테 밀리지 마라, 뺏기지 마라, 맞지 마라 라고. 드라마는 그 상황을 단지 희극적으로 조명했을 뿐인 것이다. 그러기에 요즘 아이들은, 지우개 하나도 나누어 쓸 줄 모르고, 상대방에 대한 배려보다는, 나 불편한 거에 민감한 아이가 되어 가는 것이다. 우리는 <지붕 뚫고 하이킥>을 보면서 해리가 이상하다 했지만, 예전에 해리는 왜 빵꾸 똥꾸란 말을 쓰게 되었는가란 에피소드에서 보듯이, 그 아이를 그렇게 만든 건, 바로 어른들인 것이다. 아무 때나 방구를 끼는 할아버지, 늦게 본 귀여운 아이라고 그 아이가 하는 것이면, 가치판단 없이 무엇이든 오케이 하며 키우는 부모, 그 어른들이, 맨날 갈비만 먹여 해리를 화장실도 가기 힘든 아이로 만들었고, 그들의 무심한 사랑이 남의 것과 자기 것도 구분못하는 욕심쟁이로 만든 것이다. 부모 보석과 현경은 잘 생기고 어리숙해 보이고 사회적으로 선선해 보이는 사람들이지만, 해리의 '다 내 꺼야'란 욕망을 그 아이의 학습으로 이용할 만큼, 자신의 이익이 앞선 문제에서는 기민하고 인정사정없는 사람들인 것이다. 사실 살아가며 무서운 것은, 나쁜 사람이 나쁜 사람일 때보다는, 선선한 사람에게서 순간적으로 표출되는 욕망이 아닐까. 그리고 우리 사회가 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그 문제들이 가시화 되지 않은 채 앞으로 앞으로 성장할 지도 모른다는 환상을 밀고 나가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의 그 무서운 욕망에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지붕 뚫고 하이킥>이 전작 보다 뛰어난 것은, 바로 그 우리가 안온하게 살고 싶은 지붕을 한 방에 뻥 뚫어내고 싶은 촌철살인을 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김병욱과 작가들은 용감한 사람들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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