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열패밀리>
[TV보는 여자]
오랜만에 재벌들의 ‘쌩얼’을 실컷 구경했다. 한동안 국내 드라마는 꽃미남 재벌 2세들의 독무대였다. 권상우(<천국의 계단>), 조인성(<발리에서 생긴 일>), 공유(<커피 프린스 1호점>), 이민호(<꽃보다 남자>)…. 멜로드라마에서 까칠한 부잣집 아들을 연기한 뒤 톱스타로 우뚝 선 남자 배우를 꼽자면 손가락이 모자란다.
알다시피, 멜로드라마 속 재벌 2세들의 주요 임무는 가산을 늘리거나 국가경제에 이바지하는 게 아니라 계급을 뛰어넘는 낭만적인 사랑을 통해 신데렐라를 양성하는 것이다. 이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자면 무엇보다 돈은 넘치게 많되 돈벌이에 집착해선 안 된다. 진짜 재벌인 그들의 부모가 설령 부정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했을지라도, 그 열매는 따먹되 책임에서 자유로운 것이 2세들의 특권이었다. 업무량이 많으면 임 그리워할 시간이 부족하기에 2세들은 ‘실장님’ 같은 애매한 직책을 맡거나 경영에는 도통 관심 없는 집안의 골칫거리로 등장했다. 집안, 학벌, 외모 뭐 하나 꿀릴 것 없는 그들이 내세울 것 없는 상대에게 운명처럼 끌리려면 남모르는 결핍이 하나쯤 있어야 한다. 부모의 외도로 인한 ‘출생의 비밀’이 종종 그 중책을 수행했다. 그러니 우리가 자주 보아온 드라마 속 재벌들은 적통이 아니라 방계이며, 로열패밀리가 아니라 로열아웃사이더였던 셈이다.
변화의 조짐은 <시크릿 가든>에서 시작됐다. 돈 많은 게 자랑이고 돈 잘 버는 게 특기라고 노골적으로 말하는 재벌 2세(현빈)가 등장하는 이 드라마는, 사회지도층과 소외된 이웃 간에 혼인관계가 성립하려면 장인이 사위를 대신해 돌아가시고도 모자라 당사자들의 영혼이 뒤바뀌는 기적이 필요하다고 일갈했다. 신데렐라 판타지의 내리막을 예고하며, 길라임(하지원)은 하늘의 도움으로 호박 ‘막차’를 탔다.
최근 방영된 <로열패밀리>와 <마이더스>에선 아예 ‘주류 재벌’들이 전면에 나섰다. 부를 지키고 늘리는 걸 필생의 업으로 여기는 주인공들은 ‘왕자의 난’ ‘며느리의 난’을 일으키며 여염집과는 스케일부터 다른 일상을 보여줬다. 거액 비자금을 조성해 외국에 은닉하거나 상속세를 피하려 10년에 걸친 편법증여를 계획하고(<마이더스>), 대한민국 검찰을 집사처럼 부리면서 적은 지분으로 경영권을 확보하기 위해 유력 대선후보에게 백지수표를 건넨다(<로열패밀리>). 뉴스를 통해 익숙한 내용이지만, 막상 그들을 드라마 주인공으로 만나고 보니 좀 섬뜩하다. ‘그들만의 리그’가 지나치게 실감난다고 할까. 그래도 그들이 2세 꽃미남이 아니라 ‘쌩얼’ 그대로 드라마에 자주 출연하길 바란다. 그들의 ‘쌩얼’을 확인하는 것이, 신데렐라라는 헛꿈을 꾸는 것보단 속이 덜 쓰리니까.
이미경/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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