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보는 남자
<슈퍼스타케이 시즌3>(엠넷)은 시즌2에 견줘 더 ‘악랄’해진 편집으로 긴장감을 극도로 밀어붙이고, 다음 장면이 궁금해 미치도록 만든다. 문득 이런 생각도 든다. <슈퍼스타케이>가 처음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그 지독한 경쟁구도를 비판했다. 그런데 지금은 재미있느냐 없느냐, 편집을 잘하느냐 못하느냐로 설왕설래한다. 겨우 2년 전의 비판적 태도가 무뎌지고 있는 것이다.
이 변화가 이상하지 않은가. 어째서 이렇게 쉽게 무뎌졌을까. 아무리 편집이 바뀌고 심사위원들의 태도가 병 주고 약 주는 역할로 각각 나뉘었다고 해도, 오디션의 본질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 않은가. 오히려 이런 편집과 역할극 속에서 경쟁구도는 더욱 첨예해지는데, <위대한 탄생>(문화방송)이 극적 긴장을 살리지 못한다고 비판받는 것도 같은 맥락에 있을 것이다. 결국 쾌락이 엔터테인먼트의 본질이란 얘기다.
몇 가지 반문이 있을 수 있다. 쾌락이 뭐가 나쁘냐는 것. 오디션 프로그램의 경쟁구도가 사회의 경쟁구도를 축소화했으므로 비판만 할 수는 없다는 것. 출연자들은 ‘꿈’을 위해 출연했으므로 그에 따른 책임도 져야 한다는 것. 모두 맞는 말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내가 쟁취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걸 견디며 방법을 모색하는데, 그걸 보면서 즐기는 태도를 비판할 수도 없다. 쾌락은 또한 중요하니까.
오디션 프로그램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을 유지하고 싶은 이유는 다른 데 있다. 도덕적 관점이 아니라 산업적 관점에서, 오디션 프로그램은 출연자들에게 그리 큰 결과를 보장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말해 오디션 프로그램은 관계자 몇몇에게만 이득을 준다. 방송사와 광고주와 음원사업자들 말이다. 물론 <나는 가수다>(문화방송)에 출연한 가수들은 예외다. 그들은 오랜 시간 동안 자기 콘텐츠를 확보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미국 오디션 프로그램 <아메리칸 아이돌>의 예를 보면, 엄밀히 말해 이걸로 이득을 본 건 제작비를 댄 소니 엔터테인먼트와 그 지분을 가진 사이먼 코웰, 그리고 <폭스> 방송사다. <슈퍼스타케이>도 <위대한 탄생>도 마찬가지다. 오디션이 끝난 지금 서인국과 허각, 백청강이 그들의 재능을 100% 발휘한다고 생각하는가. 오디션에서는 그렇게 소름끼치는 실력을 보여줬던 이들이 어째서 프로그램이 끝난 뒤에 평이한 음악으로 등장하는지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는가. 오디션 프로그램의 경쟁구도는 사실 실험용 유리 플라스크 안에 조성된 생태계처럼 일정한 조건에서만 가동될 뿐이다. 이 한계를 생각하면 본질적인 질문이 뒤따른다. 오디션은 사실 남의 노래를 가지고 우열을 가리는 장이다. 이때 그걸로 이득을 보는 건 재능만 가진 출연자일까, 기득권을 가진 집단일까. ‘음악’을 계속하고 싶은 사람들과 좋은 음악을 원하는 대중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건 차라리 자작곡으로 경쟁하는 프로그램이 아닐까. 더 근본적인 관점에서 말이다.
차우진/대중문화평론가, 사진 엠넷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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