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 김성윤의 덕후감
이번 글이 첫번째니만큼 이 칼럼의 전체 성격을 요약할 만한 이야기로 시작해보자. 우선 이 칼럼은 티브이를 제외한 모든 대중문화 콘텐츠를 대상으로 한다. 담당 기자와 주고받았던 농을 되뇌자면 ‘티브이 빼고 전부 다’쯤 되겠다.
한편으론 표제가 ‘덕후감’이라 무슨 뜻인지 의아할 수도 있겠다. 우선 덕후감은 ‘독후감’의 고의적 오기다. ‘덕후’의 ‘감’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덕후는 ‘오덕후’의 줄임말이고, 오덕후는 젊은 네티즌들이 ‘오타쿠’를 우리 식으로 바꿔 부르는 말이 되겠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오타쿠스럽게(?) 대중문화에 파묻혀 글을 쓸 생각은 없다. 그래서 덕후감은 중의적 의미로 사용되는데, ‘덕’(德)이 ‘후’(厚)한 감상문으로도 이해가 가능하다.
그렇다면 어떤 덕을 어떻게 두텁게 할 수 있을까? 대중문화란 이를테면 <해리 포터> 시리즈에 나오는 ‘소망의 거울’ 같은 것이다. 영어로는 ‘The Mirror of Erised’라고 하는데, 여기서 ‘Erised’는 욕망이나 소망을 뜻하는 단어 ‘desire’의 철자를 거꾸로 한 것이기도 하다. 저자가 desire를 거꾸로 썼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왜냐면 대중문화라는 거울은 우리가 사는 현실을 ‘전도’시켜 보여준다는 점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현실을 재현하는 장치라는 점에서, 과거의 거울은 아프로디테의 거울처럼 자아도취적이라 하더라도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거울은 허구적 현실을 입증하는 장치로 이해되곤 한다. 마치 작가 이상의 증언처럼,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反對)요마는/ 또꽤닮았소/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診察)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아니나 다를까. 해리 포터가 거울의 방에서 만나는 ‘소망의 거울’에는 이렇게 써져 있다. ‘Erised stra ehru oyt ube cafru oyt on wohsi.’ 이를 거꾸로 읽으면, ‘I show not your face, but your heart’s desire,’ 곧 ‘나는 네 얼굴이 아니라 네 마음의 소망을 보여준다’라는 뜻이 된다.
여기서 해리는 그토록 소망하던 엄마와 아빠를 만나게 된다. 현실에선 친척집에 얹혀살며 온갖 구박을 당해왔기에, 그에게 가족이 없는 슬픔이란 무엇보다도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이 거울은 나의 소망하는 바를 보여주지 않는가. 그러니 해리는 좀처럼 거울 앞을 벗어나지 못한다. 거울은 분명 소망을 보여줄 뿐이라 경고했지만, 이는 담배에 적힌 경고문구와 다를 게 없다. 적혀 있더라도 보이지 않고, 보이더라도 금방 잊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거울속 이미지를 단지 허구라고 치부하기에는 찜찜한 기분이 남는다. 이를테면, 대중문화라는 소망의 거울은 우리로 하여금 아무 일도 못하게 하는 그저 비생산적인 장치이기만 한 걸까. 그리고 오늘날을 살아내는 우리는 이 거울 없이 버틸 수 있을까. 또한 대중문화라는 거울 말고 우리에게 주어진 다른 거울이 있기는 한 걸까. 그 어느 것이라도 동일성과 진정성이 의심되는 요즘 세상에 말이다.
물론 이 거울은 덤블도어의 충고처럼 사람들에게 지식이나 진실을 주는 게 아니다. 또한 이상이 말한 것처럼 ‘참 나와는 반대’이기조차 한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바로 그 때문에 이 거울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비춰볼(성찰할) 장치일 수도 있다. 단지 전제조건이 있을 뿐인데, 거울이 주는 환희로부터 벗어나 거울과 나의 관계를 직시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만날 덕후감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우리는 매주 ‘거울 속의 나를 근심하고 진찰’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현실과 소망이 어떻게 전도되어 있는지 살펴볼 일이다. 김성윤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그러니까 우리가 만날 덕후감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우리는 매주 ‘거울 속의 나를 근심하고 진찰’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현실과 소망이 어떻게 전도되어 있는지 살펴볼 일이다. 김성윤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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