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의 누> (2005, 김대승 감독)
[토요판] 이승한의 몰아보기
<혈의 누> (2005, 김대승 감독)
<엑스티엠>(XTM), 4월8일(일) 새벽 2시
<혈의 누> (2005, 김대승 감독)
<엑스티엠>(XTM), 4월8일(일) 새벽 2시
종로에서 선생을 마지막으로 뵌 게 벌써 3년 전 봄이군요. 처음엔 평범한 술자리였습니다. 자제분들 학업 이야기, 사모님 근황, 부하직원에 대한 불만, 제 군생활 따위의 주제가 안주로 오르는 장삼이사의 술자리. 하지만 시국이 시국이었던 탓에, 술자리 담화도 범상치만은 않았습니다.
선생의 어조가 슬슬 반말로 바뀔 때쯤 선생께선 울기 시작하셨습니다. “승한씨 미안해. 승한씨 같은 젊은 친구들한테 이런 세상을 물려줘서.” 전 선생께서 비우신 막걸리잔의 수를 헤아리며 선생을 말렸지만, 어찌나 상심하셨던지 울음을 멈추지 못하셨지요.
오랜만에 주신 전화를 받고 그날 생각이 났습니다. 선생의 목소리는 그날처럼 격앙되어 계셨고, 시대정신, 심판, 복수, 진영, 연대 같은 단어들이 떨리는 목소리 위에서 출렁거렸습니다. 선생께선 제가 왜 선생의 말에 심드렁해했는지 의아하셨을 테지만, 저는 그날의 만남 이후 선생께서 엉뚱한 방향으로만 걸어가신 듯해서 안타까웠습니다.
영화 <혈의 누>에서 범인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은 강객주의 복수를 한다며 거짓 발고자 다섯을 죽이고 다닙니다. 그러나 책임을 따지자면 누명인 걸 알고도 눈앞의 이익 때문에 침묵을 지킨 섬 주민 전원이 죄인이지요. 주민들은 침묵으로 일관합니다. 그저 거짓 발고자 다섯만 죽으면 모든 게 끝나는 것처럼요. 영화의 마지막, 주민들은 제 죄를 뉘우치는 게 아니라 마지막 발고자를 잡아 죽이려 듭니다. 그를 죽여 객주의 원혼을 달래야 한다고 말이죠. 그런 그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하늘에선 피비(血雨)가 내려 섬을 뒤덮습니다. 전 선생께서 품은 죄의식을 모두 모아 ‘나쁜 정치인 ×’에게 투사하고 계신 걸 보며 엉뚱하게도 <혈의 누> 생각을 했습니다.
내심 여쭙고 싶었습니다. 자제분들은 결국 외고에 보내셨는지, 빚내서 충남에 사두셨다던 땅값은 좀 올랐는지, 그러면서 정말 정치인 ×와 그 졸개들만 쓰러뜨리면 새 세상이 올 거라 믿으시는지 말입니다. 선생님, 오늘의 세상을 만든 건 우리 자신입니다. 정치인 ×는 그저 이 세상의 단면일 뿐이죠. 우리 모두의 탐욕이 뭉쳐 탄생한, 가장 흉측한 단면.
우리가 스스로의 삶을 반성하는 게 아니라 큰 죄인 몇을 심판하는 것만으로 만족한다면, 우린 언제까지라도 피비 한가운데 서 있게 될 겁니다. 남을 심판하는 것으로 우리의 죄가 대속되진 않으니까요. 그러니 제가 선생과 같은 길을 걷지 않는 것,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날이 흐리네요. 나가실 때 우산 챙기시길.
이승한 티브이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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