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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방송·연예

‘멘붕’을 견디고 묵묵히 살기 위하여

등록 2012-04-13 19:26

<몽크>시즌7(USA 네트워크, 2008)
<몽크>시즌7(USA 네트워크, 2008)
[토요판] 이승한의 몰아보기
<몽크>시즌7(USA 네트워크, 2008)
<에이치디 원>(HD ONE), 화요일 밤 10시/ 토·일요일 밤 10시
잠깐이지만 편집증에 시달린 적이 있었어. 스트레스가 심하던 시절이었거든. 상담이나 받을까 하고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손을 잡고 물어보더군. “왜 이제야 왔어요?” 지금이야 웃지만, 그땐 상태가 좀 심각했어. 누군가 도청하는 게 아닐까 통화도 제대로 못 했고, 길에서 다른 이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미행이 아닐까 싶어 뚫어지게 노려보곤 했어.

이 이야기를 옛 애인에게 해줬더니 웃으면서 그러데. 자기는 어렸을 때 강박장애를 앓았다고. 그 왜 있잖아, 손을 껍질이 벗겨지도록 박박 씻고, 길을 걸을 땐 검은색 보도블록만 밟으려고 뛰어다니고, 문을 잠글 때는 세 번씩 잠갔다 열기를 반복해야 하고. 끼리끼리 만났구나 싶어 둘 다 낄낄거렸지.

편집증이든 강박장애든, 마주치는 모든 게 두려움의 대상이란 건 별로 유쾌한 경험은 아니야. 세상은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고, 남들에겐 일상적인 행동 하나조차 굉장한 의지 없으면 불가능하지. 그래서 미국 드라마 <몽크>를 처음 접했을 때 퍽 위안이 됐어. 주인공 몽크도 심각한 강박장애에 시달리는 사람이거든.

몽크는 전직 형사인데, 수년 전 아내를 테러로 잃은 뒤 강박장애에 시달리고 있어. 형사로 복직하고 싶지만 여의치 않아 대신 탐정으로 일하지. 세균이 옮을까 봐 악수조차 못 하는 사람이 형사로 일하긴 좀 어려운 일이니까. 천재적인 능력으로 인정은 받지만, 몽크는 여전히 끊임없는 공포와 불안, 그리고 자신을 향한 주위의 비아냥에 시달려.

강박장애를 앓는 이도 영웅으로 그려질 수 있다는 점이 위안이 되었던 건 아니야. 요즘 엔터테인먼트 업계는 누구든 영웅으로 만들 수 있으니까. 엉뚱한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나는 몽크가 그 불확실한 세상에서 일상적인 공포를 견디며 자기 앞에 놓인 일을 묵묵히 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위안이 되더라.

이승한 티브이 평론가
이승한 티브이 평론가
세상이 뜻처럼 돌아가지 않는다는 건 속상하고 두려운 일이지. 나와 뜻이 맞는 상대를 만나는 건 어려운 일이고, 성공이 분명해 보이는 일도 가끔은 실패하곤 하니까. 모든 게 불확실한 세상에서 좌절하지 않고 산다는 건 불가능할 거야. 정말 중요한 건 좌절을 피하는 게 아니라, 그 좌절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다시 일어나느냐의 문제가 아닐까?

친구, 너나 나나 4월12일 새벽 심각한 ‘멘붕’(멘탈붕괴)에 시달렸지. 숙취로 맞이한 새 아침은 쓰라렸고. 하지만 중요한 건 누군가를 탓하고 분노하는 게 아니라, 절망과 불안을 견디며 지금 우리 자리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묵묵히 하는 것일 거야. 희망은 거기에서부터 시작할 거고. 위안이 필요한 너와 나에게, 다시 한번 <몽크>를 권한다.

이승한 티브이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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