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혁의 예능예찬
일단 이 글은 <유희열의 스케치북>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여기서 스케치북은 그림을 그리는 진짜 스케치북을 말한다. 그런데 스케치북은 예능 프로그램에서 반드시 필요한 존재다. 무슨 뚱딴지같은 말인가 싶겠지만 실제 촬영현장에 가보면 카메라 옆에서 작가들이 부지런히 스케치북에 무언가를 써서 출연자들에게 보여 준다. 그래서 모든 촬영장에는 항상 스케치북과 글을 쓰기 위한 매직 펜이 수두룩하다.
이렇게 스케치북이 현장에서 맹활약하게 된 것은 예능은 촬영 중에는 제작진이 끼어들기 어렵기 때문이다. 드라마 감독처럼 컷을 외치며 촬영을 중단하는 것은 웃음의 흐름을 싹둑 잘라먹는, 그래서 절대 해서는 안 될 짓이다. 그러다 보니 제작진과 출연자들이 커뮤니케이션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스케치북에 글을 써서 멀리서 보여주는 것뿐이다.
촬영장에는 스케치북을 바쁘게 쓰는 제작진과 이를 살짝 보면서 자연스럽게 진행하는 엠시(MC)들 사이에는 숨 가쁜 교감이 있다. 엠시에게만 보여주고 싶은 스케치북도 있고 엠시 몰래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스케치북도 있다. 촬영 전에 충분히 대본을 숙지하고 들어가는 엠시 스타일이 있고 그때그때 상황에 따른 스케치북에 더 의지하는 엠시 스타일도 있다. 스케치북에 진행을 질질 끌어달라고 부탁할 때도 있고 빨리 끝내라고 요구할 때도 있다. 제발 좀 웃겨 달라고 애교 섞인 부탁을 할 때도 있고 5분 만 쉬자고 쓸 때도 있다. 이래저래 참 쓸모가 많다.
하지만 이런 스케치북이 간혹 대본 논란이나 연출 논란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리얼 예능’이 사랑을 받으면서 시청자들은 스케치북이 ‘연출의 증거’라며 실망하곤 한다. 사실 모든 예능에는 대본이 있다. 수백명이 동시에 움직이는 야외촬영을 아무 계획 없이 무작정 할 수는 없다. 제작진은 일주일 동안 밤새 회의를 하고 촬영 장소를 섭외하고 이동수단, 게임, 소품들을 미리 준비한다. 그리고 그 내용을 정리해서 대본을 만든다. 대본을 출연자들에게 보여줄 것인지 말지는 나중의 문제다.
물론 예능의 대본은 대사가 가득한 드라마 대본과는 다르다. 촬영 순서와 엠시의 진행 멘트, 게임의 방식을 설명하는 이른바 ‘구성 대본’이다. 예능 프로그램의 연출은 출연자들이 놀 수 있는 판을 만드는 것이지 각자의 대사를 정하고 승부의 결과를 미리 결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요즘처럼 24시간 계속 카메라를 돌리는 리얼 예능에서 모든 상황을 예상한 전지전능한 대본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런 대본을 있다고 한들 그대로 하는 출연자들도 없고 그렇게 한다고 더 재밌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예능에서 대본이나 스케치북은 항상 참고 사항일 뿐 촬영 현장은 언제나 강물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그래도 여전히 사람들은 출연자들의 재치 있는 유머가 정말 그 사람의 머리에서 나왔는지 제작진이 미리 준비한 것인지 궁금해 한다. 가끔은 나도 궁금하다. 그러나 더 좋은 예능은 더 열심히 준비하는 제작진과 더 열정적인 출연자들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만드는 것이다. 원래 스케치북이 일방적으로 글을 써서 전달하는 위한 것이 아니라 피사체를 아름답게 표현하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에스비에스 <강심장> 피디
<한겨레 인기기사>
■ 촛불집회 1시간 전…사회자 ‘이상한 긴급체포’
■ “박근혜, 진주만 와서 수영해보라고 하고싶다”
■ 통합진보당, 비례당선 6명 어떻게 될까
■ ‘기생독신’ 10년새 85% 늘어
■ 동일본 대지진에 제주 지하수 2m까지 ‘출렁’
박상혁의 예능예찬
■ 촛불집회 1시간 전…사회자 ‘이상한 긴급체포’
■ “박근혜, 진주만 와서 수영해보라고 하고싶다”
■ 통합진보당, 비례당선 6명 어떻게 될까
■ ‘기생독신’ 10년새 85% 늘어
■ 동일본 대지진에 제주 지하수 2m까지 ‘출렁’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