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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방송·연예

‘저주받은 세상’ 탈출이 백일몽일지라도

등록 2012-05-04 19:36

원스 어폰 어 타임(2011~, 미국 ABC)
원스 어폰 어 타임(2011~, 미국 ABC)
[토요판] 이승한의 몰아보기
원스 어폰 어 타임(2011~, 미국 ABC)
<폭스>(FOX) 채널, 5월5일(토) 오후 2시~밤 12시 연속 방송
사람의 목소리는 많은 것을 말해준다. 성별, 나이, 건강, 심지어는 최근 근황까지. 엘(L)은 전화기 너머 디(D)의 목소리에서 과로의 낌새를 짚어낼 수 있었다. “요즘 일이 좀 많아서 그래. 걱정할 것 없다. 너나 글 쓴다고 몸 버리지 말고.” 엘은 쓴웃음을 지었다. 안부나 물으려 시작한 통화는 점점 엘에 대한 디의 걱정으로 도배되고 있었다. 엘은 화제를 돌렸다.

“저야 늘 그렇죠. 애들은 좀 어때요? 학교엔 적응 잘해요?” 디의 아이들은 올해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디는 한숨부터 쉬었다. “요즘 고등학교는 완전히 지옥이더라.” 엘은 아이들이 겪을 고충이 눈에 선했다. 커서 작가가 되고 싶다던 디의 딸 생각도 났다. “엘 오빠도 작가야”라고 딸에게 말하던 디의 표정도 떠올랐다.

“마음 많이 안 좋으시죠? 애들 얼굴 보기도 어렵고.” “그게 그렇다. 보고 있기가 참 안쓰러워….” 엘은 아이들이 공부 말고 다른 길을 찾아간다면 어떨까 얘기하려다 말을 거뒀다. 그런 결정은 엘이나 디가 아닌 본인들의 몫일 테니. 지금 보니 디의 목이 잠긴 건 과로가 아니라 애들 걱정 때문이었다. 세상 모든 부모가 그렇듯, 디도 자식 얘기를 하면 목부터 메는 나이가 된 것이다.

안부를 물으려 시작한 통화였는데, 끊고 나니 마음이 더 안 좋았다. 어쩌다 애들 이야기를 하면 한숨부터 나오는 세상이 된 걸까. ‘요즘 애들한테 대학 가면 하고 싶은 것 다 할 수 있다 말해봐야 씨알도 안 먹히겠지? 등수와 석차로 쪼아대는 세상을 헤치며 자란 애들이 해피엔딩을 믿을 만큼 순진할 리 없으니.’

엘은 문득 <원스 어폰 어 타임>을 떠올렸다. 동화 속 주인공들이 마녀의 저주에 걸려 기억을 잃고 해피엔딩이 없는 세상에 갇혔는데, 그 세상은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이라는 내용의 미국 드라마. 엘은 자신이 마녀였어도 유배지로 이 세상을 골랐겠지 싶었다. 아이들을 쳇바퀴 속에 가둬놓고, 그 구조적 모순을 제 탓으로 돌리는 법부터 가르치는 이 세상만큼 훌륭한 유배지가 어디 있으랴.

엘은 디와 디의 아이들과 함께 원스 어폰 어 타임을 보고 싶어졌다. 주인공의 고군분투로 저주를 풀고 해피엔딩을 찾는 동화를 보며, 팝콘이나 양껏 튀겨 나눠 먹으며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우리네 삶이 퍽퍽한 건 우리가 해피엔딩을 도둑맞았기 때문이고, 저주가 풀리면 우리도 행복해질 거라는 거짓말을 믿기엔 다들 너무 머리가 굵어졌지만. 그래도 이번 주말은 어린이날이니까. 누구라도 그날 하루만큼은 어린이가 되어 꿈과 위안을 선물받을 자격이 있을 테니까.

이승한 티브이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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