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훈
허미경의 TV 남녀
‘유사품에 주의하세요.’
드라마 <패션왕>(에스비에스)을 보노라면 왠지 의약품 따위 광고에 종종 나오는 저 경고성 대사가 생각난다. 이미 본 드라마를 다시 보는 듯한 강한 기시감 때문이다. 팬들 사이에선 일종의 전설로 남은 2004년 드라마 <발리에서 생긴 일>(에스비에스)에 대한 작가의 ‘노스탤지어’가 덕지덕지 묻어 있다. 청춘 남녀 4인의 사랑과 질투, 욕망의 육질을 보여줬던 <발리…>의 마지막회에서 여주인공 이수정(하지원)은 그 남자 정재민(조인성)에게 안간힘을 다해 처음으로 마음을 고백한다.
“사랑해요.”
또다른 남주인공 강인욱(소지섭)과 함께 침대에 누운 채로, 질투에 눈먼 정재민의 총에 맞은 직후였다. 남녀 주인공 3인의 죽음으로 막을 내린 <발리…>는 삼각, 사각 관계를 뒤섞어 엇갈리는 사랑을 담아낸 빼어난 치정극이다. 두 남자 사이에서 고양이 같은 눈빛으로 계층상승 욕망을 발산하던 신데렐라 판타지의 파국(하지원), 계급을 뛰어넘는 사랑에 몸을 던진 재벌2세의 비극(조인성), 그 재벌2세의 형을 속여넘기고 비밀계좌의 거액을 챙기며 통쾌한 뒤통수를 쳤으나 결국 치정극의 주검이 되고 만 노동 계급의 아들(소지섭). <발리…>는 마지막회의 파국적 결말로 인해 더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드라마가 되었다.
작가는 인정 않겠지만, <패션왕>은 <발리…>의 유사품 혹은 모사품 같다. 남녀 넷이 그 안에서 각기 두 남자 혹은 두 여자에게 시차를 두고 연정을 뿌리는 식의 연애담이어서만은 아니다. 오만한 재벌2세와 밑바닥 출신 청년, 그 사이에 자리한 하층 계급 여자의 3각 구도가 너무도 닮았다. 당연한 귀결이랄까, 시청률 30~40%를 뽐냈던 <발리…>의 영화는 간데없고, <패션왕>은 간신히 10% 턱걸이를 하고 있다.
그런데도 이 드라마를 ‘본방사수’한다. 8년 만에 찾아온 ‘유사품’에서 ‘진품’과 다른 변주를 찾는 재미가 있어서다. 질경이 같은 생명력을 당돌한 눈빛 속에 담는 신세경(이가영 역)의 연기가 좋아서다. 무엇보다 재벌 회장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과 아버지가 인정하지 않을 사랑 사이에서 아릿하게 흔들리는 이제훈의 연기 덕이다. 재벌2세 정재혁 역의 이제훈은 자본가로서 강해지고자 하는 야비함과 한 여자 앞에서 착해지고자 하는 여림 사이에서 자기분열하는 청춘의 얼굴을 드러낸다. 제2의 조인성이란 말이 전혀 무겁지 않다.
<발리…>는 김기호 작가, <패션왕>은 김 작가와 그 아내인 이선미 작가의 공동 집필작이다. 두 작가 작품에서 재미있는 건 첫번째 남주인공은 언제나 강씨라는 점이다. 안재욱을 스타로 만든 <별은 내 가슴에>(1997)도 주인공은 강민이었고, 차인표를 스타로 발돋움시킨 <사랑을 그대 품안에>(1994)도 주인공은 강풍호였다. <패션왕>에서 1번째 주인공, 곧 드라마업계 표현으로 1번은 이제훈이 아니다. 유아인이 맡은 강영걸이다.
<발리…>의 1번인 의류업체 노동자 강인욱이 자신을 쓰고 버리려는 자본가에게 맞서며 긴장감을 빚었던 반면, <패션왕>의 의류업자 강영걸은 스스로 자본가가 되고자 할 뿐더러 성공을 위해 사랑마저 외면하는 행태를 반복한다. 유아인의 단조로운 연기가 더해져 공감을 얻지 못한다. 1번의 실패는 이야기의 실패다. 이제훈·신세경의 호연에도 <패션왕>이 폭넓은 시청자를 얻지 못한 데는 제1주인공의 퇴행에 원인이 있다.
허미경 대중문화팀장 carm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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