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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방송·연예

임신을 둘러싼 ‘넝쿨당’의 궤도이탈

등록 2012-06-01 20:05수정 2012-06-01 22:46

[토요판] 허미경의 TV남녀
임신을 하면 직장을 그만둬야 한다. 이런 메시지를 담으려던 건 아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지난 주말, 요 몇달째 인기리에 방영중인 드라마 <넝쿨째 굴러온 당신>(넝쿨당·한국방송2·사진)을 보다가 어안이 벙벙해졌다.

서울 효자동 단팥빵집, <넝쿨당>의 방장수·엄청애(장용·윤여정) 부부 집에 경사가 생겼다. 며느리가 임신했다. 우리의 주인공, 드라마제작사의 제작피디로 일하는 차윤희(김남주)씨, 당분간 시집엔 숨기고 싶었는데, 결국 다들 알게 됐다. 할머니(강부자)와 시어머니가, 출근길의 차윤희를 불러들인다. 시어머니 엄청애씨, 딸 셋과 함께 축하 꽃다발까지 준비해 놓았다. 임신을 숨긴 건 “혹시나 직장을 관두라고 하실까봐”였다는 손주며느리에게 시할머니가 말한다.

“아니, 그럼 계속 하려고? 아서라, 임신 초기에 잘못하다간 큰일 나는 거야.”

시어머니가 거든다. “그 몸으로 어떻게 어떻게 일을 해.” 큰시누이(양정아)도 맞장구를 친다.

1 대 5. 궁지에 몰린 차윤희가 맞선다. “어머니, 할머니, 저 절대 일 그만 못 둬요.”

그렇다고 물러설 ‘분’들이 아니다. “아기 낳고 나서, 너 하고 싶은 일 해.(시어머니)” “니가 나이도 있고, 조심해야지.(시할머니)” “많은 사람이 같은 이야길 하는 건 다 이유가 있는 건데. 새언니는 자기 고집이 너무 센 거 알아요?(막내시누)”

더 놀라운 건, 차윤희의 입에서, 그 대목에서 나온 이 대사였다.

“아, 잠시만요. 이렇게 하는 게 어떨까요? 다수결!”

‘맞벌이 직장여성’이 직장을 그만둘지 말지를 ‘시댁 식구들’의 투표를 통해 결정하겠다는 것이다. “(직장에서) 여기까지 오는 데도 참 힘들었다”는, “직장 일을 위해 아기를 낳지 않기로 부부가 합의”할 정도로 강한 직업관념을 드러냈던 ‘맞벌이 아내’의 입에서 쉽사리 나올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애초 설정된 차윤희 캐릭터의 변질이다.

<넝쿨당>은 애초부터 ‘현실’에서 시작했다. 판타지라기보다는 현실을 꼬집어 웃음을 줬다. 일하는 며느리와 시댁의 관계를 탐구하겠다는 이 드라마, 2012년 오늘의 이야기란 얘기다. 시댁과 며느리 진영의 균형을 유지하며 현실감 있는 인물 묘사로 ‘사위가 딸한테 잘하는 건 흐뭇한데 아들이 며느리한테 잘하는 건 섭섭한’ 한국인의 이중성을 꼬집어온 드라마의 중도 ‘궤도 이탈’이랄까.

결국 차윤희는 ‘선물’과 ‘뇌물’을 동원한 우스꽝스러운 득표 전략을 구사해 직장 일을 계속하는 데 성공하지만, 드라마는 임신하면 직장을 관둬야 한다는 ‘시댁’ 논리를 반박하는 인물들을 등장시키는 데는 인색했다. ‘이상적인 남편상’으로 인기를 끌어온 방귀남(유준상)마저 급작스레 캐릭터를 변경한다. 직장을 관두라고 한다. 반면, 큰시누이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표 단속’을 한다. “절대 찬성하시면 안돼요. 임신 초기에 일하는 거 얼마나 힘든데. 철도 없지.”

그 순간, 드라마는 임신과 출산, 육아 부담을 짊어진 채 생계를 위해, 꿈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많은 맞벌이 노동자의 삶을 ‘철없다’는 말로 ‘요약’한다. 폭력적이다. 극중 인물들은 ‘임신부가 일하는 건 철없는 행동’이라는 주장이 오늘 한국사회의 ‘상식’인 양 행동한다. 차윤희를 제외하곤 누구도 이 관념에 토를 달지 않는다. 2011년 현재 우리나라 부부 1162만 가구 가운데 맞벌이는 44%다. 홑벌이 42%를 이미 넘어섰다.

허미경 대중문화팀장 carm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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