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이승한의 몰아보기
<대국민 토크쇼 안녕하세요>(한국방송, 2010~ )
<케이비에스 조이>(KBS Joy), 6월2일(토) 오전 10시10분,
오후 9시10분, 3일(일) 오후 8시20분
엄마하고 전자제품 매장에 함께 오는 게 아니었어. 양평동 이씨는 마음속으로 몇 번을 되뇌었다. 어머니는 벌써 몇 차례고 전에 쓰던 티브이가 10년도 채 못 버티고 고장 났다는 사연을 점원을 붙잡고 하소연하고 있었다. 아니, 같은 회사 제품도 아니고, 다른 회사 제품 흉을 여기서 왜 보느냐고 대체.
“거 그만하십시다. 뭐 대단한 자랑거리라고 그래요.” “내가 답답해서 안 그러냐. 램프 교체한 거 할부 끝나기 무섭게 쿨링 팬이 나가는 게 말이 되니? 그리고 생산된 지 10년도 안 된 제품 부품이 단종은 왜 되니, 단종이.” 옆에 서 있던 점원은 이씨 속도 모르고 맞장구를 친다. “어머니, 맞습니다. 그 회사보단 저희 회사가 애프터서비스도 낫지요.” 맙소사, 앓느니 죽지.
날짜를 정해 제품을 배달받기로 하고 돌아오는 길, 이씨는 심사가 뒤틀린 게 영 개운치 않았다. 상대가 누구든 장광설을 늘어놓는 어머니도 못마땅했고, 그걸 다 받아주며 어떻게든 더 비싼 제품을 팔아보려 틈을 노리던 점원도 못마땅했다. 이씨는 끝내 가시 돋친 말을 뱉고야 말았다. “엄마는 왜 아무나 붙잡고 아무 얘기나 합니까, 그래?”
길 가다 말고 날벼락을 맞은 어머니는 물끄러미 이씨를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뗐다. “그럼 네가 평소에 내 말을 좀 들어주든가. 원래 내 고민 누가 들어주면 반절이 되고, 내가 남의 고민 들어주면 그이에게 위안이 되는 게 세상살이 아니니? 넌 나한테 왜 아무나 붙잡고 이야기하느냐고 했지? 그럼 넌 왜 그 ‘아무나’만큼도 내 얘기를 안 들어주니?” 이씨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집에 돌아온 이씨는 밥상에서 어머니를 마주할 염치가 없어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그날따라 이불은 유달리 까슬까슬했고, 이씨는 내내 뒤척이다 갈증을 핑계삼아 일어나야 했다. 고장 난 티브이를 치워 휑한 거실에 나오니, 어머니가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뭐 봐요, 이 밤에?” “그 왜, 일반인들 나와서 자기 고민 털어놓는 토크쇼 있잖아. 신동엽 나오는.” 아, <안녕하세요> 재방송을 보고 계셨군.
이씨도 어머니 옆에 앉아 휴대폰을 들여다봤다. 하나같이 다 참 민망한 고민인데, 그걸 방송에 나와 전국 단위로 고백하는 이들의 표정은 이상하게도 후련해 보였다. 하긴, 함께 걱정해주고 때론 민망하지 않게 웃음으로 덮어주는 이들이 있다면 고민의 무게도 한결 가벼워지겠지. 이씨는 생각했다. 이거만 다 보고 미안하다고, 엄마 말이 옳다고 말하자. 엄마의 얘기도 더 잘 들어 드리자. 작은 화면을 함께 보려 바싹 붙어 앉은 모자의 그림자가 봄밤 달빛에 길어지고 있었다.
이승한 티브이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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