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준의 다큐 세상
조명이 어두워지면 언제나 가벼운 설렘을 느낀다. 금쪽같은 시간을 쪼개서 일부러 찾는 영화관이다. 1만원 가까운 돈도 지불했다. 나는 어떤 식으로든 2시간 동안 즐겁게 보낼 권리를 샀다. 웃기는 영화라고 했다면 나를 웃겨야 한다. 스펙터클하다고 자랑했다면 한두 번쯤은 내 눈이 휘둥그레져야 한다. 그 정도는 해야 하는 것이다.
나카타 히데오의 <링> 이후로 무서운 영화는 보지 않지만 그런 영화 보는 사람을 이해는 한다. 돈까지 내며 일부러 공포를 맛보려는 까닭은 마지막 10분에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끝을 알기 때문에 공포는 시작부터 즐겁다.
<두 개의 문>(사진)은 좀 다르다. 극영화가 아니라 다큐멘터리 영화라서 그럴까? 다큐는 텔레비전에서 봐야 편하다. 극영화로만 익숙한 영화관에서 다큐를 보는 것이 나는 늘 낯설다. 남의 구두에 발을 쑤셔넣는 느낌이다. 그런데도 이 영화를 보러 가야 했다. 부채감 때문이었다. 어렵게 만들었고 힘들게 개봉했다는 소문은 들었다. 어렵고 힘든 거야 감독의 사정이고 제작자의 팔자겠지만 영화가 다루는 사건은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물론 내 이야기도 아니다. 그렇다고 오롯이 남의 일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주체가 묘하게 엉킨 사건이다. 외면하고 싶었다. 그런데 포스터에 그려진 전경의 얼굴이 잊었던 부채를 기억나게 했다. 다시 조명이 어두워질 때 나는 내가 느낄 감정이 궁금해졌다.
영화는 훌륭했다. 그러나 친절한 내레이션 따위는 없었다. 몇년 전 뉴스에서 보던 그림만 반복됐다. 툭툭 자른 인터뷰가 불쑥 이어지곤 했다. 그래도 나는 숨을 죽이고 스크린을 응시한다. 예쁘게 꾸며진 허구의 공간이 수도 없이 겹쳤던 스크린에 서울 시내가 투사됐다. 내가 사는 도시인데 고담시처럼 보인다.
빌딩에 불기둥이 치솟았다. 세트도 아니고 특수효과도 아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을린 계단을 전경들이 오른다. 저런 상황은 극영화에서나 볼 법한데, 그들은 배우가 아니다. 시너가 타오르는 망루 속의 철거민들도 스턴트맨이 아닐 것이다. 구성은 좀 더 치밀해야 하는데, 이 영화는 인과 없이 돌발적이다. 사람이 스러지고 타는데 수괴는 좀처럼 나타날 기미가 없다. 이래서야 흥행이 될까 싶을 즈음에 그림자 하나가 어슬렁거린다. 생김새로 봐서 누군지는 짐작하겠다. 하지만 그림자는 두께가 없고 흔적은 남지 않는다.
다시 밝은 거리로 나왔다. 영화의 잔영이 윙윙거린다. 불타는 남일당 건물이 맞은편 빌딩에 겹쳐 보이고, 전경의 비명이 청년들의 얼굴에 어른거린다. 현실이 영화가 되고 영화가 현실이 됐으니 이 영화는 끝날 리가 없다.
좋았던 영화는 내리기 전에 한번 더 보고 싶어진다. <내 아내의 모든 것>도 <시작은 키스>도 또 보고 싶다. 이 영화 <두 개의 문>도 다시 볼 것이다. 끝까지 알 수 없었던 내 감정의 정체도 확인하고 싶고, 무엇보다 다치고 아픈 이들을 대신해 용감한 목소리를 내던 슈퍼히어로들(이 영화에서는 변호사와 기자, 시민 등으로 구성돼 있다)의 얼굴도 다시 보고 싶다.
김형준 교육방송 다큐멘터리 피디
<두 개의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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